제목 | ■ 믿기만 하면 그저 만나는 그분을 / 부활 제3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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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4-16 | 조회수19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믿기만 하면 그저 만나는 그분을 / 부활 제3주간 화요일(요한 6,30-35)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삶에서 생명의 일부를 유지하게 하는 필수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 그분께서 말씀하신 이것들은, 단지 영적인 생명을 뜻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곧 신뢰 등을 말할 게다. 이는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미사 전례에 깊이 참여하여, 그분의 영적 양식을 얻자.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인간은 영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육체가 성하면 영혼도 성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는 육체만 건강하면, 영혼은 의당 자동으로 건강해지는 줄로 착각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표어를 너무 많이 들어 온 탓일 게다. 사실 이 외침의 본래 의미는 육체와 함께 정신 영혼도 함께 더불어 건전해지려는 뜻이리라. 그렇지만 육체미인 건강미가 훨훨 넘치지만, 영혼이 병든다면 영적 갈증이 심각해 불안이 떠나지 않는 증세가 나타날 수도. 아마도 거친 사막에서 강한 짐승은 누가 뭐래도 낙타일 게다. 운송 수단으로 쓰이는 낙타는 아주 강렬한 태양 아래서 잘도 견딘다. 자신의 몸에 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많은 물이 있는 건 아니라나. 여느 동물과 비슷한 양이지만, 낙타는 자신에게 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한다. 그래서 낙타는 오아시스에서 물을 채우려 무릎을 곧잘 꿇는다. 물이 삶의 근원임을 익히 알기에. 그래서 그것이 희망이 되어 사막의 뜨거움을 견디어 내는 것이리라. 이렇게 사막에 강한 동물이 낙타라면, 식물은 선인장이리라. 사실 그 줄기는 최대한 물을 머금고자 뚱뚱하다. 그렇지만 잎은 최소한의 물로 버티고자 가늘어졌다. 선인장 가시는 잎이 퇴화된 것이라나.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 이렇게 모양새마저 바꾸었다. 그러기에 선인장 꽃은 슬픔을 간직한 화려함을 지닌다. 이런 지혜를 생각하며 주님께서 빵으로 오신 이유를 묵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의 양식인 빵이 되셨다. 죽음으로 산 이의 양식이 되었다. 신앙의 역설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빵이 되신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이 빵은 사랑에 굶주린 이에게는 삶의 양식이다. 우리 삶에서 사랑의 굶주림은 계속된다. 인생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다. 얼마나 많은 이가 권력과 소유욕을 찾아 불나비가 되어 가고 있는지? 신앙인인 우리가 영적으로 목마르지 않으려면, 생명의 빵인 그분과 함께 가야만 하리라. 그분만이 인생의 바로 그 오아시스이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생명 그 자체이기에 목마르지 않으려면, 당신께로 오라신다. 사실 목숨을 부지하는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 살아남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최우선의 문제는 ‘배고픔과 목마름’이다. 그래서 부모는 피땀 흘리며 자녀를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려 힘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생명의 빵이니 나에게 오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아기가 사랑으로 대해 주는 부모가 있으면 기뻐하는 것처럼, 주님 모시고 사는 이는 늘 행복해질 게다. 삼위일체를 믿는 우리의 오아시스는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그분 믿기만 하면, 그저 만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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