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부활 제3주간 수요일 강론>(2024. 4. 17. 수)(요한 6,35-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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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6 | 조회수18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생명의 빵>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6-40).”
1) 여기서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 보았다면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빵의 기적’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5장에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라는 말씀이 있고(요한 5,36), 뒤의 10장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예수님을 증명합니다.
2)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르심’은,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초대”입니다(요한 3,35-36).
“나에게 올 것이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는 신앙인들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10장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0,15).
예수님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가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에도
적용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3) 여기서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뜻’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뜻’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따라서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하느님께서 보내셨다.”인데,
당신의 신성과 권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구원을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유다는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반대쪽으로, 즉 멸망으로 가버렸습니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는 나라”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자격 제한’은 있습니다.>
40절의 말씀은, 39절의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한 신앙인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영원’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 시간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를 동원해서
복잡하게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영원’의 반대말은 ‘찰나’, 또는 ‘허무’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뒤의 17장 3절에,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라는 예수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하느님,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고,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고,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뒤의 8장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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