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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묵상 시리즈 제27강] 율법과 십계명 5/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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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19 조회수165 추천수0 반대(0) 신고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요즘 사방이 다 꽃밭입니다.
길가도, 산도, 제가 있는 이 사제관 주변도 아주 몽환적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이 꽃들이 좀 오래 갔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려보죠.
그렇지만 바람에도 떨어지고, 또 비가 오면 꽃이 많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꽃이 오래 가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욕심이 아닐런가 생각됩니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낙엽을 만드는 본인 자신의 일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늦게 떨어져라, 꽃이 좀 더 보고 싶다.’ 한들 또 그 말을 듣지 않는다 한들
나무들을 원망할 이유도 없고 또한 권리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나무들은 아무 욕심부리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질서에 따라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는 꽃을 아쉬워할 필요도 없겠고요.
꽃이 빨리 진다고 해서 또 그것을 서운해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율법과 십계명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로 레위기와 신명기를 중심으로 중요한 율법에 대한 것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6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삼 년째 되는 해 곧 십일조를 바치는 해가 되면, 네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떼내어 레위인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을 너희 성안에서 실컷 먹게 하여라. 그리고는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아뢰어라.’
‘레위인’이라는 것은 신전에서 일하는 제사직을 맡은 사람들을 얘기합니다.
또 ‘떠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타국인, 외국 사람을 얘기합니다.
그 타국인에 대하여서도 참 많은 규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규정의 핵심은 뭐냐?
타국인을 고아나 과부와 같이 보호해서 타국에서의 생활의 어려움을 동정하고 어려운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의 떠돌이라고 부르는 외국인들에 대한 하나의 배려입니다.
 
신명기 24장 18절에 또 이런 말이 나오죠.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해 보아라. 그런 너희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건져내셨다는 것을 잊지 마라.’
 
또 21절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포도를 딸 때에도, 한번 지나간 다음 되돌아가서 다시 뒤지지 마라. 그것은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해 보아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니, 너는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한다.’
 
신명기는 약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에 대해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반복해서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고 있죠.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정말 긴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 민족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고통을 타국인들에게 절대로 짐 지워서는 안 된다고 율법으로 훈계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한 시집살이를 받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돼 며느리에게 고통 주는 모습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고통을 주자.’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자세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기에 길러진 이웃 사랑’을 보여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일을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로 성실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한 고통을 나 역시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의 위치에 올랐을 때,
다른 사람에게 더 심하게 고통을 준 적은 없었는가?
 
신명기는 고아나 과부, 또 떠돌이로 표현되는 타국인에 대한 보호, 사랑, 연민, 자비를 굉장히 율법으로써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지금 거의 400만 명 정도 되는 외국인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또 그분들이 없으면 우리 경제가 유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장 힘든 일들을 하고 있죠.
그래서 이제는 어느 지역에 가든지 외국 노동자들을 자주 봅니다.
식당이건, 공사 현장이건, 어디든 간에.
그런데 그들을 고용한 고용주들이 정말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이 성서의 가르침대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혹시 그들을 악랄하게 착취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주어야 할 돈을 주지 않고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지는 않는지.
그런 상처를 받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그들은 한국에 대해 결코 좋게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몸은 고되더라도 한국인들의 따뜻한 정을 느끼고 돈을 벌어 자기 고향으로 간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고마워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릴 겁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본 구약의 율법에는 굉장히 구체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조금만 더 대인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는 아니지만 출애굽기 21장에는 살인에 관한 법령, 또 과실치사 및 과실치상에 관한 법령이 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우리들이 많이 알고 있는 24절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시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또 그 바로 위 22절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밀쳐서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사고만 없으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배상액을 재판관의 조정하에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아주 정말 구체적인 법률입니다.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이런 법령을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민족이다.’ 하는 존경심마저 갖게 됩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 말을 현대의 우리도 자주 사용합니다.
성서 안에 있는 이 말이 어느 사이엔가 일상으로 정착한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참 섬찟한 얘기죠.
내 눈이 누군가에 의하여 빼내졌으면 내 눈을 뺀 상대방의 눈을 빼라는 아주 맹렬한 보복심을 불러일으키는 법률입니다.
이집트에서 많은 고생을 해보아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게 하라는 율법도 있고, 고아와 과부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하는,
전반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서 많은 법률이 만들어졌는데,
유독 아무튼 살인이나 과실치사라든지 과실치상에 관한 법령은 굉장히 엄격합니다.
 
누구나 이 24절의 말을 들으면은 당연히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율법이 만들어진 내용을 살펴보면 ‘아 그래서 이러한 것이 나왔겠구나’ 하며, 딱 무릎을 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것은 보복의 규칙이 아니다 라고 하죠.
변상의 율법이라는 겁니다. 또 다른 말로 ‘동태복수법’이라 합니다.
당한 만큼 돌려주라는 얘기죠.
‘남의 생명을 빼앗았으면 자기 생명으로 보상하라’ 이렇게 법률에 명시돼 있습니다.
‘남의 눈을 손상했으면 자기 눈을 빼서 보상하라.’
상대 이를 한 개 뺐으면 자기 이 한 개 빼서 보상하라는 뜻이죠.
다시 말하면 상대에게 준 고통을 자기도 맛보지 않으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보상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보복을 억제하는 목적도 된다는 그 뜻이죠.
진정한 의미의 보복은 내가 당한 고통을 그 사람도 똑같이 느끼게 한다고 하는, 어찌 보면 굉장히 정의로운 보복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이상 선을 넘지 말아라. 네가 당한 것만큼만 보복하라’고 하는 분노의 방지를 억제하는 법률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눈을 잃으면요, 분노한 나머지 상대의 한눈만이 아니고 생명까지 뺏을 생각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래서 ‘눈에는 눈으로만 견뎌야 한다.’
그런 뜻으로 율법이 세워졌다는 얘기입니다.
 
구약의 형법에는 징역 3년, 10년 등등의 투옥에 관한 규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투옥에 관한 예를 들어서 눈을 다치게 한 사람은 2년, 발은 3년, 이런 규정이 없다는 겁니다.
신약성서 대사전에는 유대 땅에는 감옥은 있었지만, 투옥형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투옥이라고 하는 것은 옥에 가두는 거죠.
‘투옥형’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죄를 범하면 피해자 마음 내키는 형벌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눈을 다쳤으면 상대편 눈을 다치게 하는 걸로 끝나지, 감옥에 가두지는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 말이지요.
‘눈에는 눈 정도로 참아야 한다.’
인간은 이렇게 결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일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받은 아픔을 최대한으로 느낍니다.
눈을 빼냈으면 목숨을 빼앗아도 부족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회면 한쪽에 아주 짧게 실린 기사입니다.
바보 새끼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 집을 찾아가서 바보 새끼라고 한 사람을 살해했다.
요즘 보면 그와 비슷한 얘기 너무 많죠.
인격적인 모독을 당했다고 해서 칼로 서슴없이 찌릅니다.
이것은 ‘눈에는 눈으로’ 동급 보상은 아닙니다.
바보 자식 소리 들었다고 해서 그 소리가 사람을 죽일 만큼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얘기하는 ‘눈에는 눈으로’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사랑의 법입니다.
‘네가 당한 것만큼만, 그 선에서 끝내야지 더 나가면 안 된다.’
그래서 바로 이 법은 정의의 법이요. 하느님 사랑의 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법은 완성된 법은 아니었죠.
예수님에 의해서 율법은 완성됩니다.
그게 뭡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네가 당한 것만큼만 보상, 그 정도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자식이라면 너에게 해코지한 사람,
너의 가장 귀중한 것을 앗아간 사람, 너를 정말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그 사람을
저주하거나 네가 당한 것만큼만 가서 해주겠다고 하는 그 생각마저도 버리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것을 믿으라는 얘기죠.
왜? 하느님도 보고 계시기 때문에,
네가 당한 고통이 얼마나 크고, 너를 고통스럽게 한 그 인간이 얼마나 못된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네가 보복하려 하지 마라, 내가 심판하겠다.’
 
이 성서 강의 제일 처음 시작할 때 그런 얘기를 했죠.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 있고, 신약에 의해서 구약은 완성이 된다.’
구약의 율법은 하느님 자비의 율법보다는 그에 앞서서 정의의 율법입니다.
‘동태복수법’, 당한 것만큼 복수해라.
그렇지만 신약의 율법은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보복할 권리가 없다. 죄에 대한 심판과 벌은 하느님이 바로 내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큰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어떤 성범죄, 섹스에 대한 율법을 골라본다면 레위기 20장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함께 죽인다.
제 어미와 동침하는 자는 둘 다 죽인다. 자부와 동침하는 자는 둘 다 죽인다.
장모를 취하면 그들도 함께 죽인다.
짐승과 교합하는 남녀들은 함께 죽인다.
 
당시에도 동성애 또 짐승과의 교합, 근친상간 등이 있었다는 증거가 확실히 됩니다.
참 어쩌면 지금 세상과 그 옛날 세상과 그렇게 똑같을까?
인간은 아직도 인간다운 그 진지한 생활을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가 똑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얘기죠.
더구나 근대에 와서는 이런 일을 자랑으로 삼고 섹스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기 한이 없습니다.
만일 현대에도 조금 전에 읽은 율법을 적용한다면 죽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을 겁니다.
 
또 이런 율법도 있죠. 레위기 19장 14절.
‘귀머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에게 악담하거나 소경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앞에 걸릴 것을 두지 마라.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라. 나는 야훼이다.’
저는 지금도 FM 라디오를 거의 하루 종일 틀어놓고 있습니다.
저는 KBS 클래식 음악들이죠. 텔레비전보다 라디오 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라디오에서는 만담을 많이 했습니다.
혼자 나오든지 아니면 남녀가 나와서 우스갯소리를 하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한 만담가의 얘기가 참 비위에 거슬렸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귀머거리에게 욕을 해도 괜찮다, 귀머거리는 욕해도 듣지 못할 터이다.’
귀머거리를 아주 이렇게 비하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어떻게 저렇게 무식한 소리를 할까?’ 하고 참 답답하게 생각했었죠.
물론 귀머거리 인신공격하는 목적은 아니고 웃기려고 한 거겠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손한 말이고,
인정 없는 말을 하지 않으면 도대체 만담 거리가 없단 말인가, 하며 어린 마음에도 심히 불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또 오래전에 본 TV 연속극에도 그런 얘기가 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산책하고 있는데 그 아들이 멀쩡한 다리를 질질 끌며 장애인 흉내를 내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보니깐, 그 뒤쪽에 정말 다리를 절고 있는 장애인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가 다리를 저는 것을 흉내 내는 것에 몹시 화가 나 5, 6세 된 아들을 때렸죠.
아들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죠.
아버지는 좀 더 바람 쐬다 집에 가보니 아내와 모친이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애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때렸냐, 장난삼아 한 짓인데 때리지 않아도 될 것을 왜 때렸냐?
아내도 화를 내고 또 어머니가 책망하니, 아버지는 아이 때린 내가 잘못한 것인가 멍청하게 있다가 자기가 나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 드라마였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분노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일이지요.
다리가 장애가 있는 아이를 흉내 낸 아이는 당연히 맞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 그 모친도 더 꾸중했어야 합니다.
검정을 흰 것으로 통과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레위기 19장 15절.
‘공정하지 못한 재판하지 마라. 가난한 이라고 하여 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봐 주지 마라.
이웃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
이렇게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도 않고, 세력 있는 자를 두둔하지도 않는 이런 재판은 분명히 공정한 재판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세력 있는 자를 두둔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죄를 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재판을 받기 이전에 그들은 면제받고 있죠.
우리는 그러한 사건을 얼마든지 알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또 재벌들, 이런 사람들은 정말 큰 죄를 지었어도 편안한 감옥에서 잠시 있다 빠져나오고,
힘없고 세력 없고 좋은 변호사를 쓸 수 없는 억울한 사람들은 옥살이합니다.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그 귀한 인생을 감옥에서 허비하는 사람들도
예전에 수인 사목을 하며 정말로 많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레위기나 신명기, 이런 법률서에는 정말 자주 법률 얘기한 다음에 항상 뭐로 끝나느냐?
나는 너의 하느님 야훼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소위 법률서를 통해서 흐르고 있는 정신은 분명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율법을 꿰뚫고 있는 정신 중의 정신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성별 된 존재로서, 또 하느님에게서 사랑받는 존재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명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법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하느님 거룩하심’ 앞에 두려움과 경애심을 갖지 않는 한 율법은 죽은 문자로 화하고 만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들이 양심이 없어서 죄를 짓습니까? 몰라서 죄를 짓습니까?
죄짓고 난 다음에 걸리면 벌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몰라서 죄짓지 않지요.
우리들을 경건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즉 경외심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신명기에 하나같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다섯 번에 걸쳐서 율법과 십계명에 관한 이야기들을 흩어봤습니다.
제가 장, 절과 함께 말씀드렸던 것을 여러분들도 줄 쫙쫙 그으면서,
그 앞뒤 연관 문구를 한번 쭉 훑어보면서 레위기, 신명기를 읽으신다면,
‘세상에 대단하다. 그 옛날에 이렇게 구체적인 법률이 있었구나, 참 대단한 민족이다.’,
아마 이런 것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판관기에서 인물을 묵상하겠습니다.
괴력의 사나이 삼손 아시죠?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삼손의 이야기를 둘러보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시고
그 말씀이 열매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성령이 함께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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