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황님_ “용기는 우리가 세상의 악에 맞서 ‘아니오’라고 외치게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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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19 | 조회수14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교리 교육: 악습과 덕 13. 용기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10일 수요 일반알현 교리 교육을 통해 사추덕 가운데 하나인 “용기”가 삶의 두려움, 불안, 시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용기는 우리가 겁먹지 않고 낙담하지 않는 선원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용기는 또 우리가 세상의 악과 무관심을 진지하게 마주하도록 이끈다. 교황은 오늘날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복음에서 “예수님의 용기”를 다시 발견하자고 초대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 교육 시간에는 사추덕 가운데 세 번째 덕인 ‘용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용기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봅시다. “용기는 어려움 중에도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하도록 하는 윤리적 덕이다. 용기는 도덕적 삶에서 유혹을 이기고 장애를 극복하고자 하는 결심을 확고하게 해 준다. 용기는 공포를, 심지어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겨 내게 하며, 시련과 박해에 맞서게 해 준다”(1808항). 이것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용기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추덕 가운데 가장 “전투적인” 덕이 바로 용기입니다. 사추덕의 첫째 덕인 현명이 주로 인간 이성과 연관이 있고, 둘째 덕인 정의가 의지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면, 셋째 덕인 용기는 “난폭한 충동”으로 불렀던 것과 연관이 있다고 고대 학자들은 종종 생각했습니다. 고대 사상가들은 인간 열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돌과 같다고 생각했죠. 아울러 열정은 언제나 죄의 찌꺼기가 아니라 교육을 받아야 하고, 방향을 잘 잡아야 하며, 세례 때의 물 또는 성령의 불로 정화되어야 합니다. 용기가 없는 그리스도인, 선을 위해 힘쓰지 않고 그 누구도 성가시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무미건조한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열정적인 영혼의 감정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또한 성전에서 사고파는 이들을 쫓아내기도 하셨습니다(마태 21,12-13 참조). 예수님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삶에서 열매를 맺는 데 도움이 되는 이 중요한 덕목에 대한 실존적 설명을 살펴봅시다. 고대 사상가들, 곧 그리스 철학자들과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용기의 덕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바로 ‘소극적’ 형태의 용기와 ‘적극적’ 형태의 용기입니다. 먼저 소극적 형태의 용기는 ‘우리 내면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불안, 근심, 두려움, 죄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물리쳐야 할 원수들이 있습니다. 이런 원수들은 내면에서 활동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합니다. 도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러한 내면의 원수들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상대로 한 승리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은 많은 경우 비현실적입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죠. 그러니 혼자가 아니라 성령께 간구하면서 우리 역량에 따라 한 번에 한 가지씩 해결하겠다는 마음과 인내하는 용기로 모든 일에 맞서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진심으로 선을 구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방패와 갑옷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용기의 두 번째 형태는 훨씬 더 활동적인 성격입니다. 우리에게는 내적 시련뿐 아니라 ‘외적인 원수들’도 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인생의 시련’, 박해, 어려움 등이 그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예측하려고 애를 쓰지만 현실은 대부분 미리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서 가끔 우리가 탄 배는 크게 요동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는 우리가 겁먹지 않고 낙담하지 않는 선원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용기의 덕은 ‘세상의 악에 대한 도전을 진지하게 마주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덕입니다. 혹자는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인간의 의지를 맹신하면서 죽음을 불러들이는 어둠의 세력이 역사 안에 숨어 있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저 역사책 한 권 또는 신문을 뒤져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인간이 어떤 경우에는 희생자, 어떤 경우에는 잔혹행위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쟁, 폭력, 노예제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상처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많은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용기의 덕은 우리가 이 모든 행위에 “아니오”라고 단호히 외치고 행동하도록 이끕니다. 모든 것을 적당히 희석하고, 완벽을 향한 여정을 단순한 유기적 성장으로 변질시키며, 모든 것이 공정한 것처럼 보이기에 싸울 필요가 없게 느껴지는 안락한 서구 사회에서 우리는 때때로 건강한 예언자에 대한 향수를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안주하고 있는 안락한 자리에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악과 무관심으로 이끄는 모든 것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를 반복하게 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악과 무관심에 “아니오”라고 말하고, 우리를 성장시키는 여정에는 “예”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용기를 다시 발견하고, 성인·성녀들의 증거를 통해 용기의 덕을 배우도록 합시다. 고맙습니다! 번역 이재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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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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