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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요한 6, 60 -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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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19 조회수184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68)


사람은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6,51) 라는 말씀을 계기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6,52) 하고 어제 복음은 연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6,60) 하고 전해 줍니다. 한 마디로 유다인은 물론 제자들마저 투덜거렸다고 그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유다인들과 제자들에겐 귀에 거슬릴 뿐만 아니라 믿기는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이었기에 이런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사실 진리를 한순간에 깨닫거나 깨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많은 사람은 삶을 깨어 살아가면서, 체험들이 마치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가면서 차츰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산과 이 산에 피어나는 꽃들과 날마다 신록으로 옷을 바꿔 입어가는 나뭇잎은 그냥 그렇게 변한 것 같지만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죽음과도 같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또 이겨내 피어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의 계속되는 빵에 관한 말씀 역시도 한순간에 알아들을 수 있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자들 역시 당신의 말씀을 지금 당장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언제가 당신의 죽음과 묻힘 그리고 부활하심을 겪고 난 뒤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했고 불편했기에 군중은 물론 많은 제자가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은 떠나기 마련이고 오직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이 당신 곁에 머물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68) 하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과 다시 만나고, 호숫가에서 함께 빵을 먹고 난 뒤 비로소 그는 자신이 고백했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68) 라는 그 고백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었죠. 부활을 체험한 후 부활의 시선에서 새삼스럽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생명의 빵이신 주님으로 보고 믿게 되었기에, 더 이상 ‘듣기 거북한 말씀이 아니라 이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63) 라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우리 또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떠나 어떤 누구에게도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남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은 “영은 생명을 준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63)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사도 베드로의 열정과 성령으로 충만한 활동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과 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전 저희 어머니는 가정에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한데, 그중 하나는 걸레요 다른 하나는 노인이다, 고 말했습니다. 이는 가장 쓸모없게 보이지만 가정에서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공동체가 필요한 존재는 어떤 사람일까요? 분명 오늘 독서의 ‘타비타’처럼 우리 역시도 가정이나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자 잃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비타가 죽고 난 뒤 과부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울며 그녀를 다시 살려주시도록 애절히 간청합니다. 타비타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시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요6,65참조)이기도 한 타비타를 향해 “타비타, 일어나시오.” (사9,40)하고 그녀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다음 과부들에게 돌려줍니다. 우리 또한 타비타처럼 주님의 부활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시118,12)라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길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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