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런 체험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신뢰를 주었던 사람,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었던 사람, 굳게 믿었던 사람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내 뒤에서 험담과 모함을 하고, 나를 떠나가는 그런 체험... 더 이상 내가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 이상 내게서 얻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는지, 야멸차게 얼굴을 돌리고 관계를 차단하는 그런 체험...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지라, 가끔 하게 되는 체험입니다. 그런 체험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열악하고 힘겨운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누가 진국인지? 누가 허당인지? 누가 진정한 벗인지? 누가 하이에나 같은 존재인지? 서서히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던 예수님께서도 그런 쓰라린 체험을 제대로 하셨습니다.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십니다. 더 이상 놀라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힘과 능력과 권위를 지닌 해결사 모습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분 입에서 나오는 말씀, 사람의 아들은 적대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고난을 겪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한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향점과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던 사명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탓할 게 아닙니다. 떠나감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숱하게 반복됩니다. 그저 육의 이끌림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 살게 됩니다. 본능에만 따라 살 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별 의미 없는 말씀, 구름잡는 이야기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논리로만 예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알쏭달쏭한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화두로 붙들고, 묵상하고 또 묵상할 때, 조금씩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영혼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말씀, 생명수보다 더 값진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늘 위를 생각하시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데, 떠나간 제자들은 한사코 아래만 내려다봤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래의 세상만이 전부인 양 뚫어지게 아래만 바라봤습니다.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물론 아래, 이 세상, 때로 구차스럽게 보이는 일상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위와 아래, 영혼과 육신, 하늘과 땅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죽기살기로 아래만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의 삶 속에 영적인 측면은 초라할 정도로 위축되고, 그저 육에 따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도착지는 비참이요, 죽음일 것입니다. 한명 한명 떠나가는 제자들의 모습 앞에 마음이 몹시 슬퍼지셨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복음 6장 67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