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요14,8.7)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알고 있다, 는 말씀과 우리가 ‘아버지를 알고 있다, 는 말의 의미와 깊이가 전혀 다름을 인정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러기에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지’ 알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더 알고 있나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14,7) 하고 말씀하신 까닭은 토마스의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사실 토마스가 찾고 알고자 하는 아버지께 가는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에 어디로 갈 필요가 없듯이, 우리가 볼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집 또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 계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고 아는 것’은 사물을 관찰하고 아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사도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난 뒤 ‘보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아는 것’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이고, ‘나를 알고 보는 것’은 결국 나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뵌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전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하는 표현이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사실 저는 제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를 아는 듯싶지만, 인격적인 관계나 체험을 통한 앎의 차원에서 잘 모릅니다. 저는 불효자인지도 모릅니다. 흔히 남자는 자식을 낳고 길러봐야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를 알게 된다고 봅니다. 저는 아버지로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참으로 한 사람, 한 남자로서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정호승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 병드신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허리가 구부려져 더 이상 펴지지 않게 된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더 잘 알게 되고 사랑할 수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 시인에 비해서 저는 제 아버지를 모시고 살지도 못했으며 사랑할 그런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미국 유학 다녀온 1986년 10월, 부모님 모시고 제주도를 거쳐 경상도 부곡 온천으로 여행을 갔었습니다. 그때 온천에서 아버지와 함께 목욕하면서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렸습니다. 나이 드시어 쇠잔해진 아버지의 삭은 몸을 보고서 마음이 아파 아버지의 등에 제 얼굴을 대고 울었던 기억이 다행스럽게 정호승 시인의 시, 「못」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튼 저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아버지를 사랑할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기에 아버지의 진면목을 잘 모릅니다.
이렇게 제 아버지의 있음과 행하심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 제가 하물며, 어찌 하느님 아버지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그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필립보의 우문에 공감합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14,8) 그런데 시선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제 형제와 누이들을 보면 예전 부모님의 모습이 언뜻 보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는 말처럼 자녀들의 모습에서 그 부모님의 모습을 능히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아버지를 볼 수 있기 위해서 인간적인 봄이 아니라 신앙적인 봄이 요구되고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14,10)하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 (14,11) 하고 재차 강조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나, 아버지가 될 때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의 눈, 영적인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아빠 하느님을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보는 것이로되, 보여지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를 볼 수 있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할 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은 단지 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 역시 실행하면서 주님을 따르려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깨달아 가고 보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했기에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알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가렵니다. 또 다른 사랑의 이야기는 다름아닌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깨달아 알고 살아가렵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정호승의 못을 보냅니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 질 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 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 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 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