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하여 손우배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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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27 | 조회수213 | 추천수2 | 반대(1) 신고 |
얼마 전 나는 종교와 관련된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제는 영화에서 자신의 눈앞에 전개되는 참담한 과정을 겪으면서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그러한 장면은 영화가 전개되면서 여러 번 있었는데,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영화 속의 그 사제야말로 참으로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기도를 드리던 그 사제의 모습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 기도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는 과연 기도를 통해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있는가?
사실 가까운 친구에게나 연인에게 우리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했다면, 다시 그런 실수를 하여 친구에게 또 다른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 친구를 만나면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더욱 잘해주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또 회사에서 업무에 대한 중대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고 직장상관에게서 느끼는 감정과도 같다. 그렇다면 나는 죄를 짓고도 잘못을 뉘우치는 기도를 드린 후에 또 전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다가 또다시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친구나 직장상관만도 못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절대선(絶對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그저 보편적인 윤리관과 가치관에 따라 나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라는 인물을 그저 그 절대선이라는 것에 포장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선이라는 석고상을 향해 죄의 용서를 청한 것이 아닌가? 또 다른 형태의 우상으로서… 절대선 아니 어쩌면 내가 어떤 선(善)의 기준을 만들고 그에 이르지 못하는 내 자신을 자학하는 것은 또 아닐까? 어떤 보상심리를 위해… 아마도 그것은 친구나 가까운 연인 그리고 직장상관과의 관계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격적인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인격적인 교류가 없는 탓일 것이다. 그것은 곧 하느님 현존의식에 대한 결핍이다. 친구나 직장상관의 현존은 아주 구체적인 현실로 인식하고 있지만, 주님의 현존은 그러하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한 인간으로 느끼며 기도하고 있는가? 과연 나는 기도를 통해 그 분의 숨소리, 체온 그리고 그분의 표정과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바로 주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가까운 친구의 현존을 구체적인 내 현실 안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친구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나 친구와 함께 하는 대화와 같은 것이다. 즉, 기도를 통해 인간적인 감정을 그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급격한 자기 변화를 했던 사람들도 바로 이렇듯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이다. 아마도 우리가 고백성사 후 쉽게 다시 죄짓는 것도, 우리의 나약한 본성도 있지만, 이러한 주님의 현존의식에 대한 결핍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자. 과연 보고픈 친구를 그리워하듯이 그분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는가? 특별히,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나는 얼마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고 있는가? 참으로 내 대신 사형선고를 받고 죽은 한 친구의 죽음으로 느끼고 있는가? 그 분의 어깨에서 머리에서 그리고 손발에서 흘리는 그 핏방울을 볼 수 있는가?
이냐시오 성인은 그의 "영신수련"을 통해 이러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관상하면서 예수님의 표정, 그분의 목소리 그리고 땀 냄새까지 관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현존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이며, 이러한 현존의식을 통해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영신수련에서 중세의 기사 출신인 이냐시오는 영원한 임금이신 주 하느님을 관상하면서 현세의 왕에게 충성하는 모습과 비유해서 설명하기도하고, 묵상 길잡이를 통해 장소나 사람들을 관찰하며 구체적인 복음의 장면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초대를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를 드리며 주님의 현존의식을 느끼면서, 구체적으로 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듯이 기도를 하는 것이다. 즉, 그분의 현존에 대한 확신과 바로 내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시다 생각하며 그분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 안에서의 인격적인 만남은 일상에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나의 삶에서 내가 얼마나 주님과 친밀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분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따를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만남을 위해 우리의 부단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가 들은 것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내면화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께 마음을 열어 기도 드려야 할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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