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떠남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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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4-30 | 조회수351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참 좋은 선물, 주님의 평화-
눈만 열리면,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루하루 날마다 배울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리하여 제 좋아하는 강론 주제중 하나가 ‘배움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일에 지치지 않아야 강론쓰는 것도 덜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승의 두 자질이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꼽으며 공자는 호학(好學)을, 배움을 좋아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은 오늘 하루 잘 살아보라고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선물하십니다. 하루를 마칠때면 흐뭇하게 마치는 경우는 드물고 늘 아쉬움만 남듯 죽음앞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날은 하루하루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제 모 일간신문의 첫 사설은 우리나라 하루 42명이 자살한다는 기사였습니다. 얼마나 삶이 고달프고 절망적이었겠나 생각합니다. 출산율은 꼴지인 나라가 자살율은 1위이니 참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삶은 떠남의 여정이요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오늘 4월 30일이 끝나면 내일부터는 계속되는 파스카 시기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성모성월의 시작이요 행사도 유난히 많은 5월입니다. 아마 스승의 날 전후로는 50년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도 저를 찾을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끝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마지막 죽음의 떠남도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갑작스러운 잘 떠남의 죽음은 없습니다. 정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떠남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어제 밤에 받은 연미사를 부탁하는 이름이 특이하여 자매에게 물었더니 시할머니 이름이라 하여, “시할머니 이름까지 기억하여 연미사를 봉헌하니 참 대단하십니다.” 답신을 드렸습니다. 시할머니가 잘 살다 잘 떠난분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보낸 내용도 삶을 뒤돌아보게 했습니다.
“요즘 신부님의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머리로만이 아닌 가슴에서 절절했습니다. 어찌 평생을 이렇게 한결같이 살 수 있을까요?”
평생 정주의 서원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의 심정 역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 하나뿐일 것입니다.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떠남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아는 가르침을 아무나 실천하지 못하듯, 보통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보통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다산> 하루하루 날마다 보통이상의 노력으로 살아야 한결같은 정주의 삶이겠습니다. “바른 이치에 순종하면 여유가 있고, 욕심을 따르면 위험에 빠지게 된다”<장자> 바른 이치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한결같은 평탄대로 정주의 삶일 것입니다.
어제 받음 카톡 메시지 ‘인생의 6대 잔고’란 글도 공감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반드시 남겨야 할 3가지와 반드시 비워야 할 3가지입니다. 남겨야 할 세가지는 “1.가족에게는 그리움을, 2.친구에게는 웃음을, 3.세상에는 감동을” 남겨야 하고, 비워야 할 세가지는 “1.마음의 빚, 2.마음의 응어리, 3.우정, 애정 인정의 정”이라 합니다. 친구에게는 우정의 잔고를, 반쪽의 반려자에게는 애정의 잔고를, 세인들에게는 인정의 잔고를 남김없이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좋은 사랑의 추억을 가득 남기는 것이겠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무료진료소 “요셉의원”을 세워 21년간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다 선종한 선우경식 원장일 것입니다. 지난 4월18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파밀리아 채플에서는 선우경식 원장의 16주기 추모미사 봉헌과 더불어 <의사 선우경식>출판기념회가 열렸었습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떠남을 보여줍니다. 정말 이웃에게, 친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참 좋은 떠남일 것이며 특히 죽음의 경우는 그러합니다. 남은 가족들에게 그리움과 평화, 일치를 선물로 남기고 떠나는 이들의 장례미사를 보면 흡사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종종 그런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장례미사를 보면 그분의 전생의 삶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죽음을 앞둔 주님의 선물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고맙고 아름다운지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면서 주신 참 좋은 평화, 똑같은 평화를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서도 주십니다. 세상의 평화, 사람의 평화가 아닌 주님의 평화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화요 단지 폭력의 부재인 평화가 아닌 더욱 긍정적이고 더욱 깊은 평화입니다. 역설적으로 크나큰 고통과 혼란중에도 평화요, 외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또 우리가 올바른 장소에 있다는 확신에서, 내적 안정감에서 선물처럼 오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죽음의 위협도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그런 평화입니다. 바로 성인들이, 우리가 간혹 체험하는 주님의 평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가 마음 깊이 내재해 있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의 성공적 선교 여정이요 사목방문이었음을 봅니다. 두 사도 역시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감동적인 떠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사도는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말하며 이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아 줍니다.
하느님의 은총 덕분으로 선교여정을 완수한 두 사도는 그들을 파견한 안티오키아 교회에 도착하자,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하고 오래 머물며 지친 심신을 충전하니 참 해피엔딩으로 끝난 선교지 사목방문입니다. 바로 이 성공적 선교여행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은혜는 주님의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좋은 선물, 당신의 평화를 선사하시어 우리 모두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알리나이다.”(시편145,12).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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