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부활 제5주간 화요일 <평화라는 안전망 없이 다리를 건설하지 마라> 복음: 요한 14,27-31ㄱ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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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홀로 방치되어 기계어로 말하는 6세 아들’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금쪽이는 울면서도 컴퓨터 게임기에서 말하는 기계어로 엄마는 물론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계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게임기를 거의 엄마처럼 여기고 게임기와 물아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엄마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까지 혼자 술을 마십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를 깨우지 못하고 엄마 옆에서 게임을 합니다. 오전 내내 그럽니다. 아이는 불안합니다. 불안을 해소해주는 이는 엄마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평화를 주지 못하고 게임기만이 불안을 잠재워주니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게임기를 엄마처럼 여기게 된 것이고 게임기의 목소리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떤 아이들이 자기가 게임기라고 여기는 이와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는 외톨이가 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이고 그분에게서 오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맺어주는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기 절제, 혹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능력들입니다. 엄마는 먼저 이처럼 성령을 받아서 내 안에 평화의 열매가 맺히게 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문제는 사랑도 기쁨도 평화도 자기 안에서 저절로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와 떨어진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먼저 평화를 얻는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평화를 해치는 것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아입니다. 자기를 믿으면 불안해집니다. 엄마를 믿지 않고 자기만 믿는 아이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엄마와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순종입니다.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문도 안 열고 그냥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하들은 그것보다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아마 했을 것이라며 자존심을 좀 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몸을 씻었더니 나병이 나았습니다.
자존심을 죽여야 평화가 옵니다. 나를 믿으며 동시에 엄마를 믿을 수 없습니다. 엄마를 믿으면 나를 맡겨야 합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로부터 평화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에게 진흙을 발라주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까지 가면서 소경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씻고도 눈이 생기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순종은 자존심을 없애고 겸손해진 이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지원을 한없이 받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하시는 것은, 내가 먼저 평화를 갖지 않으면 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성령의 평화를 가지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평화를 얻는 법을 모르면 아기를 낳으면 안 됩니다. 엄마의 자격입니다. 금문교를 지을 때 안전망이 없을 때 많은 인부가 떨어져 죽어서 그물망을 하고서는 진척이 잘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평화가 없다면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에게 불안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매일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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