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 1,21-28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2년 동안 평일 강론을 유튜브에 올렸고, 이제는 구약성서 창세기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묵상이죠. 그래서 ‘이야기’라는 타이틀이 항상 들어갑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 카인과 아벨 이야기. 창세기 저자가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고대 근동 지방에 떠돌던 설화를 갖고 온 거죠. 유튜브 강론 들으시는 분들, 이제 카인과 아벨 종결까지 다 끝났는데 들으셨죠? 운영자들은 다 듣고 계십니까? 운영자들은 들어야죠. 안 들으면 자격이 없어요. 가장 먼저 운영자들이 듣지 않으면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강론해요. 난 내가 한 것도 하루에 서너 번 들어요. 열심히 준비해서 했기 때문에. 운영자들이 먼저 듣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야죠.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을 잘 안 봐요. 그중에 특히 구약성서는. 어렵기 때문에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죠. 그렇기에 묵상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어떤 신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성경을, 특히 구약성서를 좀 가까이하기 위한 안내서 혹은 지침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죠. 카인과 아벨 이야기 들으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나 궁금증이 해결된 것이 있습니까? 그렇죠, 카인이 살인을 했을 때 상황과 물어봤을 때 회피하는 태도, 그리고 맨 마지막에 카인에게 ‘이제 누구에게도 너는 해코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시고, 카인이 떠나가서 일가를 이루는 과정들. 그것이 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죠. 아벨 입장에서 보면 카인은 죽일 놈이지만, 카인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이 그 죄인을 살리려고 애쓰시는 것이 너무 감사하죠.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권선징악 아니잖아? 이상하네’ 그 생각을 갖는 것은 본인이 정의 쪽에 있다고 생각할 때라 했죠.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눈물 날 정도로 감사하죠. ‘내가 죄에 떨어졌을 때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살리려고 애를 쓰셨구나!’ 늘 하는 얘기잖아요. ‘죄의 불감증’ 네 번째 강의 마지막 부분에 그런 얘기가 나와요. 아담과 하와가 셋이라고 하는 셋째 아들을 낳았고 그 셋째 아들이 자식을 낳았죠. 이름이 뭐죠? ‘에노스’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렀다’라고 나와요. 이것이 뭐냐? ‘깨어졌던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내가 늘 얘기하잖아. 신앙은 관계성이라고 그랬어요.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에요. 아담과 하와의 손주가 바로 할아버지가 지은 죄. 대물림으로 내려오는 가계 쪽의 상처를 에노스가 하느님께 정식으로 예배드리면서 치유가 시작이 된 거죠. 그리고 그 후에는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다고 그랬죠. 누가 몇 년 살고 몇 년 살고 나오다가 의미심장한 사람이 하나 나오죠.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와요. 다른 사람은 몇 년 살다 죽었다고 나오는데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고 나오죠. 에녹 이야기는 단 한 줄밖에 안 나오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하느님이 산 채로 데려갈 정도면 얼마나 아름답게 산 사람이었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김웅열 신부 죽었을 때 묘비에다 이렇게 쓰고 싶다 했죠. ‘김웅열 신부는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하느님이 데려가셨다.’ 우리 모두 다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해요. 그리고 이제 노아의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에녹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어받은 사람은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 중 노아 한 사람뿐이었죠. 여러분들이 이렇게 듣고만 있으면 천재가 아닌 이상은 다 잊어버려. 적어놓아야 해요. 저도 평화방송이든지 어떤 목사님 강론 들으면 하다못해 휴대폰에 메모해 놔요. 사람의 귀는 저장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어요. 기록으로 남겨야지만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겠죠. 오늘 복음에는 어떤 얘기가 나옵니까?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첫 번째가 세례받으셨죠, 요르단강에서. 그다음에 뭐 하셨을 것 같아요? 사탄과 싸웠죠, 광야에서. 즉, 구마 했잖아요. 그다음 세 번째가 뭐예요? 이것은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것을 내가 말할 때 속에 딱 박아놓아야 해요. 얼치기로 알고 있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에요. 세 번째는 제자 불렀어. 세례받으시고, 광야에서 마귀랑 싸우시고, 그다음에 하신 것이 치유가 아니에요. 제자 불렀어요. 그리고 네 번째가 오늘 회당에서 가르치신 거예요. 가르치면서 마귀 떼어냈잖아요. 예수님이 회당에서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고 계실 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악령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바로 여기에서 마귀를 싸워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가 확실히 드러나요. ‘쌍띠따스(sanctitas). 거룩함’이에요. 마귀가 벌벌 떨고 스스로 나 마귀라고 고백하게 하는 그 힘, 그리고 마귀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하는 그 힘, 말 한마디 찍소리 못하고 물러나게 하는 그 힘, 그것이 뭐라고요? ‘거룩함’ 내가 피정 때마다 정말 많이 얘기했잖아요. 지금 시대는 거룩한 사제가 필요한 시대, 거룩한 수도자가 필요한 시대, 거룩한 평신도가 필요한 시대라고 얼마나 강조를 많이 합니까. 왜 거룩하게 살아야 해요? 특히 지금 같은 환난의 시대에는 거룩하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그냥 장님이에요. 귀를 열고 있어도 귀머거리에요. 그것을 다른 말로 ‘영적 분별’이라고 해요. 영적 분별은 성경을 10번 읽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10번 읽고 오히려 교만해질 수도 있죠. ‘나 많이 알아’ 잔뜩 교만해질 수 있어요. 거룩해져야만, 그 거룩함에서 샘솟는 은총이 바로 영적 분별력이죠. 영적 분별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룩하게 살 수밖에 없죠. 나는 분별은 잘하는데 거룩함이 없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모순된 얘기죠. 영적 분별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거룩함. 그러면 거룩하게 살려면 제일 첫 번째 단추가 뭐예요? 기도지 뭐예요. 뭘 어렵게 생각해요. 거룩함의 첫 단추는 기도에요. 기도 없는 봉사, 기도 없는 봉헌, 기도 없는 선행, 그것은 별 의미가 없어. 기도가 제일 기초예요.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어요? 마귀 새끼는 거룩해지는 평신도를 제일 무서워하고, 거룩한 사제를 무서워하고, 거룩한 수도자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거룩하게 안 되게 하려면 기도를 못 하게 해요. 그러니까 지금은 집집마다 온 가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거의 없어요. 다 따로따로 놀아. 이태리제 십자가만 거실, 방에 걸려 있고, 묵주만 차에 매달고 다닐지언정 기도 안 하거든. 기도하더라도 그냥 해치우는 식으로, 안 하면 손해 볼 것 같은 마음으로 하죠. 마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룩함 쪽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죽을힘을 다해요. 그래서 마귀가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이 뭐냐? 기도 못 하게 만들어요. 바빠서, 아파서, 오늘 성질 나서, 오늘 술 먹고 들어와서, 피곤해서. 오만 핑계를 대면서 멀어지게 만들어요. 유혹이 뭔지 압니까? ‘기도하고 일하라’고 하는 것을 못 하게 만들어요. 일하는 것이 곧 기도다. 이렇게 착각하게 만들어요. ‘나 오늘 4시간 성당에서 봉사했거든요. 너무 피곤해. 주님, 기도 안 해도 되겠죠?’ 그런데 그것은 별개인 것이에요. 제가 피정 때 그런 이야기 하죠? 피정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1시 2시, 내 몸은 자꾸 침대로 가자고 끌어요. 그래도 오늘 못 한 기도하고 자야 하잖아요? 성무일도도 바쳐야 하고, 오늘 못한 것 꾸벅꾸벅 졸더라도 해야 해요. 꽃동네에 많은 봉사자가 처음에는 그야말로 하느님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똥오줌을 장갑도 안 끼고 만져요. 그런데 하루 종일 노인네들 똥오줌 만지고 파김치가 되고 나면 성당 안 들어가거든. 성체에서 멀어지고 기도도 안 하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두드려 패요. 고무장갑을 3개 4개를 껴도 똥이 더러워. 그전에는 맨손으로 똥오줌을 만져도 냄새가 안 났는데요. 기도하지 않고 그것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사제도 교우들을 보면 이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바로 알아요.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신부님들 보면 기도하는 사제인지 아닌지 알 거예요. 그것은 서로가 알게끔 주님께서 서로에게 레드카드를 줬어요. 오늘 마귀가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도미니카, 나 너 누군지 알아. 너 기도 좀 하는구나.’ 마귀 입에서 우리들이 들어야 할 것은 ‘당신은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함’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죠. 아까 얘기했잖아요. 마귀가 벌벌 떨고, 스스로 자기 마귀라고 고백하게 만들고, 또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고, 말 한마디 못 하고, 찍소리 못하고 그냥 물러나게 하는 힘, 바로 거룩함의 힘이에요. 그래서 나에게 거룩함만 있으면 마귀 물리칠 수 있어요. 내 가정을 지킬 수 있어요. 집안에 거룩하게 사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그 가정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지켜낼 수 있어요. 자물쇠를 수십 개 채워놓은 철옹성 같은 집에 숨어 산다 해도, 경비원을 수십 명 보초 서게 한다 해도, 쇳덩어리 집에서 쥐구멍 하나 없이 산다 해도 마귀는 들어올 수 있어요. 마귀한테 그런 집은 문제도 아니야. 마귀는 눈 깜짝 안 해. 그러나 내가 거룩함으로 집에 산다면 자물쇠도 필요 없고 경비원도 필요 없어. 또 이 거룩함은 돌같이 굳어 있고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도 부수고 녹이는 힘이 있어요. 거룩한 사람 앞에 서면 차가운 사람이 녹아요. 거룩한 사람 앞에 서면 돌처럼 굳어 있는 사람이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해요. 그래서 거룩함은 마귀만 쫓는 큰 무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아주 큰 힘이에요.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에요. 거룩함은 이렇게 큰 힘이 있어요. 그래서 마귀는 반복되는 얘기지만, 어떻게서든 거룩하게 못 살게 만들어요. 왜? 거룩하게 살면 분별력이 생겨요. 현재 나한테 오는 고통이 하느님이 허락하신 고통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만든 어리석음의 고통인지, 이것이 마귀의 장난인지 아니면 성령께서 나를 더 강하게 달구기 위해서 주신 시련인지,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정확하게 정리해 나갈 수 있어요. 사제들도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교우들에게 올바른 강론을 할 수가 없잖아요. 이 어둠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을 잡아줄 수가 없어. 예수님처럼 나침판 역할을 해야 하는데 나침판 역할을 못 하잖아요. 여러분 많이 들으셨던 얘기 있죠?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복음 구절을 대할 때마다 저는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옛날 신학교 시절 사형수 얘기 아시죠? 그렇죠, 유명한 얘기죠. 사형수 얘기 못 들으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으니 간단히 얘기하면 그거죠. 옛날 신학교 시절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과 함께 ‘개미회’를 만들어 운영했어요. 그건 뭐하는 모임인가? 교수 신부님들과 신학생 방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수요일과 토요일 수거해서 분리했죠. 거기서 나오는 종이를 꽉꽉 밟아 가마에 채워 고물상에 가면 그때 당시 10원인가를 줬어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광주교도소에 있는 사상범들과 간첩에게 먹을 것을 사갔죠. 그때는 사과 하나, 귤 하나가 귀했던 시절이었죠. 이분들과 우리 신학생은 1대1로 매치되어 있었는데, 내 파트너는 어떤 분이라고 그랬어요? 한마디로 얘기해서 토마토, 겉도 빨갛고 속도 빨간 공산주의자야. 모스크바에서 유학까지 한 사람인데 종전 후 그야말로 휴전선 100m 앞에서 잡힌 사람이래. 교도소에서는 공산주의 버리지 않겠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독방에서 못 나와요. 그래서 수십 년 동안을 독방에 있었죠. 그러다 보니까 말할 사람이 없어서 입이 다 굳어 버렸어. 말 못 하는 거죠. 못 알아듣고. 그리고 눈빛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몰라요. 당시에 그 양반이 한 60 중반 됐었어요. 1년 동안 매달 갔지만 난 한마디도 그 양반 입에서 들어본 말이 없었어요. 나 혼자만 떠든 거야 그러다 딱 1년째 되는 날, 12번째 갔더니 귀를 갖다 대라는 거야. 그런데 내가 쉽게 갖다 댔습니까? 아니죠. 그전에 스님이 귀 갖다 대었다가 고막이 터지고, 목사님은 귓불이 찢어졌다는 말을 들었죠.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귀를 쉽게 갖다 대?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이더니 내 귀를 확 잡아당겨서 자기 입에다 갖다 대더라고. 그래서 1년 만에 들은 소리가 뭐야? ‘종간나 새끼, 죽여버리겠어.’ 아직도 그 음성이 기억나요 ‘너 나 사상 바꾸러 들어왔지? 하느님이 어딨어? 총 있으면 다 쏴 죽이고 싶어. 공산주의 믿는 게 죄야? 나가라. 이 간나 새끼’ 한마디도 못 하고 쫓겨나온 다음 교도소장한테 이제 무서워서 못 오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 교도소장이 천주교 신자였는데 이러시는 겁니다. ‘학사님, 개신교에서도 포기하고 절에서도 포기했는데 우리 천주교마저 포기하면 어떡합니까?’ 알았다고 하고 신학교 가서 제대 옆 바뇌 성모님 앞에 갔죠. 고개 살짝 숙인 빈자의 어머니, 그 앞에 무릎 꿇고 ‘성모님, 제가 두 가지를 희생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할아버지 좀 바꿔주세요.’ 두 가지는 첫 번째 아침 굶기, 또 하나는 매일 묵주 15단 바치기. 그때는 빛의 신비가 없을 때니까 15단. 하지만 이 두 개 모두 신학생으로 하기가 어려운 것이었죠. 그때만 해도 신학생들은 간식이라는 게 없이 오로지 밥 세 끼 먹고 하루를 버텨야 해. 그리고 쌀도 별로 안 좋은 쌀이야. 알랑미(안남미). 그런 거였어요. 아침에 미사 끝날 시간 되면 저 밑에 식당에서 반찬 냄새가 성당 안으로 들어와. 그러면 미사 끝나자마자 신학생들이 ‘천주께 감사합니다.’ 하죠. 이제 밥 먹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뜻이야. 다른 신학생들은 밥 먹으러 가고, 나는 휴지로 코 막고 냄새 안 맡으려 했죠. 또 묵주 기도는 어떻게 했겠어요? 밤에 다 잘 때 혼자서 화장실에 앉아 묵주 기도 하다가 문짝에 부딪히고. 아무튼 기를 쓰고 했어요. 그땐 나도 참 순수했어. 그리고 매달 나갔지만, 변화될 기색이 안 보여. 아니 눈매가 더 무서워졌어. 그러니까 어떤 유혹이 왔겠어요? ‘내가 이거 괜한 짓 하고 있네. 저 사람은 안 돼. 괜히 약속한 거 아니야?’ 몇 번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뭐냐? 어린 시절에 우리 어머니가 하셨던 얘기, ‘성모님께 매달리면 절대 거절하시는 법 없단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귀를 갖다 대래요. 그날은 내가 쉽게 갖다 댔죠. 왜냐?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나보고 웃는 거야. 2년 만에 처음으로 그 양반 나보고 웃었네. 그래서 설마 웃으면서 귀때기를 때리지는 않겠지 생각하며 귀를 갖다 댔죠. 그랬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내가 졌어. 학생이 이렇게 거룩하니 학생이 믿는 하느님이야말로 얼마나 거룩하실까? 이제 조금 이해가 돼. 많은 사람이 나를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왔다가 ‘종간나 새끼’ 하면 다시 안 왔어. 그럴수록 분노만 차올랐는데 학생은 달랐어. 그 욕을 얻어먹고도 매달 와서, 말 한마디 내 입에서 듣지 못하면서도 혼자서 웃다가 재미난 얘기를 하다 가.’ 왜냐하면 난 얘기를 준비해 갔거든요. 그러면서 그분이 ‘나 같은 사람도 천주교 신자 될 수 있나?’ 물으셨죠. 기적이 일어난 거죠. 아까 얘기했잖아요, 내가 거룩해지면 돌같이 굳어 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마음도 부서지고 녹는다. 그래서 그분은 즉시 공산주의를 포기했고 공동방으로 옮겨갔죠. 그러면서 이제 말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내가 한 달에 두 번씩 교리를 가르치러 나갔죠. 거기서 모범수가 되고 반장 완장까지 차더니, 4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나셨어요. 신학교에서 보증을 선 거죠. 그리고 그때 마침 신학교에 경비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시어 자리가 비어있었어요. 학장님한테 아저씨를 추천했죠. 그분은 교도소에서 수십 년 있으면서 자격증을 한 열몇 개를 땄어요. 목수부터 경비도 하시면서 의자 부서지면 그냥 고쳐주고, 침대 덜그럭거리면 고쳐주셨죠. 그리고 마침 신학교에 빈집도 있어 거기서 사시게 했던 거죠. 그다가 또 어떤 일도 있었다고요? 재혼. 물론 그분은 이북에 처자식이 있었지만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죠. 재혼 생각 여쭈었더니 묵묵부답. 신학교에 밥해 주시던 예순하나 된 과부가 계셨죠. 그래서 이 두 양반을 달 밝은 밤에 신학교 뒷동산에서 만나게 해드렸죠. 그랬더니 전기가 뿅뿅뿅뿅 와서 바로 학장 신부님 주례로 혼배, 신방을 꾸몄죠. 그 후 저는 사제가 돼서 신학교를 자주 갈 수가 없었죠. 어쩌다 가면 그 할아버지가 경비실에서 성경 읽다 막 뛰어나와 확 끌어안았어. 항상 그러셨어요. ‘신부님, 신부님 보면 하느님 보는 것 같아요. 그 옛날 귀때기 붙들고 간나 새끼 했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안 찾아왔다면, 아마 벽에 부딪혀서 자살했을 거예요. 지금 이렇게 호강하고 삽니다. 거룩한 곳, 신학교에서요.’ 저는 거룩하다고 하는 말을 사람한테도 쓸 수가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죠. 왜? 내가 들었으니까. ‘학생이 그렇게 거룩하니 학생이 믿는 하느님이야말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일까?’ 그분은 물론 오래전에 돌아가셨죠. 하지만 그분의 입을 통해 거룩함은 마귀를 쫓아낸 것만이 아니라 그분도 변화시켜 준 거예요. 우리는 오늘 우리들이 정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거룩함이다’입니다. 거룩함은 마귀를 쫓아내는 강력한 무기일뿐더러 사람들을 회개시킬 수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냉담하는 내 식구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가 있어. 그래서 우린 거룩하게 살아야 해요. 하지만 사실 거룩하게 산다는 거 쉽지 않죠. 그래도 우리 절망할 필요는 없어요. 왜? 우리 전부 다 죄인이지만 거룩한 죄인이에요. 우리들이 완벽하게 살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건 아니에요.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우리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어요. 난 늘 그렇게 생각해요. ‘성인 성녀들이 거룩하게 살다 가셨다면 나도 할 수 있다.’ 그분들이 했다면 왜 우리가 못하겠느냐 이거죠. 성인 성녀들이 한평생 죄 안 짓고 산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거룩해질 수 있었어요. 그분들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은 교만은 아니에요. 이건 충만함이죠. 아무리 자물쇠를 많이 채워놓아도 마귀는 다른 건 다 뚫고 들어와요. 하지만 허허벌판에 홀로 있다고 해도 나 자신이 거룩하면 마귀는 내 근처에 얼씬을 못해. 마귀는 너무 잘 알죠. 내가 구약 묵상 ‘카인과 아벨 이야기’할 때 카인을 쫓아내시며 무슨 표시를 해주셨다고 했죠? 우리 세례받을 때 이마에 십자가로 인호가 박힌다고 그랬잖아. 그 인호가 신자 생활 제대로 못 하고 냉담하면 빛이 다 흐려져. 그렇지만 거룩하게 살면 반짝거려요. 난 여러분들 다 보여요. 인호가 화장품 바른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사제들은 교우들의 그걸 봐요. 이마에 박힌 세례 때 받은 십자가. 인호는 지옥 불에 가서도 안 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박히는 거예요. 카인에게 줬던 표시가 바로 인호를 박아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신자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이 카인에게 박아줬던 그 인호를 세례 때 전부 다 받잖아요. 하느님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살도록 합시다. ♣2024년 연중 제4주일 (1/28)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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