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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요한 15, 18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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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03 조회수307 추천수3 반대(0) 신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5,18)

묵상 나눔에서 ‘저에겐 참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없습니다.’라는 표현이 어떤 분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그리고 섭섭함을 불러일으켰을지 모르겠습니다. 단어 하나를 이렇게 삽입했었다면 좋았으리라 봅니다. ‘저에겐 참된 우정을 나누는 세상적인 친구가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나 여러분 모두는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에서 뽑힌 사람들,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벅찬 감격이고 축복받을 일입니까? 우리는 뽑힌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별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요17, 14)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세상에 뽑으시어 주님에게 주신”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서 뽑혀 하느님께 속한 사람인 우리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우리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다른 시선 곧, 삶의 목적과 가치 그리고 삶의 태도와 행동 양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다른 존재 태도로 살아야 하고 다른 가치관과 다른 삶의 형태를 취해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내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뽑아주시고 선택하신 하느님의 뜻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를 뽑은 그분의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당신의 사람으로 당신의 구원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들의 삶에 어려움이 시작된다고 보입니다. 

오늘 복음의 밑그림은 목요일의 복음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15,1-8)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보듯이 불성실한 가지는 잘려 나갈 수도 있으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그 가지는 나무와 모든 생사를 같이 나눈 한 운명공동체입니다. 공동운명체의 중심인 나무(=스승이자 벗이신 예수님)와 가지(=세상에 뽑힌 제자들이며 벗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는 필연적으로 나무가 겪을 일을 가지 또한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이 겪게 될 세상의 미움과 증오, 그리고 박해와 죽임은 필연적이라는 점입니다. 즉 나무가 겪게 되는 모든 것은 가지 또한 겪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더욱 복음서를 편집하던 시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 (15,18)하고 언급하면서 이런 배경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미움을 받았기에, 제자들 역시 스승에게 속해 있기에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그 사랑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즉 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처럼 세상의 가지들과 어울려 지낸다면 세상의 환대와 사랑을 받을 것이지만,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자체가 아직도 스승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의 서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제자들에게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3,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는 말씀을 제자들이 깨달아 알고 실천할 때 행복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마치 종이 되어 종들과도 같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지만, 종이 주인보다 결코 높을 수 없습니다. 주인을 태운 나귀의 착각은 자유라지만, 때론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도 있어 왔습니다.

본문 그대로 이해하자면 세상이 주는 미움과 박해 가운데서 이를 극복할 힘은 ‘친구와 친구’의 관계보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종은 결코 주인이 받는 것 이상은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조금은 섭섭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깊은 속뜻을 헤아려 보자면 주님이 바라시는 바는 박해 가운데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으면 그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승화되며, 이 사랑은 ‘친구인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할 기회를 주님께서 기꺼이 허락하고 계십니다.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뽑힌 제자들인 저희가 당신의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면서 당신께 대한 사랑으로 이 모든 시련과 박해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리고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격려하셨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 뽑아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뽑아 선택하신 까닭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고 그 응답은 또 다른 사랑의 일치와 친교를 이룰 것입니다. 

“주님 사도 바오로의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당신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제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음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도록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모든 일을 통하여 당신 이름이 영광 받길 바라옵니다. 아울러 사도 야고보의 다음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며 살렵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 (야고 4, 4)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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