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 근처에 저희 공동체와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의 집이 있습니다. 피정 센터 큰 행사 때도 초대하고, 여름 겨울 캠프 때는 아이들이 저희 집에 와서 마음껏 뛰고 즐기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희 할아버지들은 그저 마음이 흐뭇할 뿐입니다. 한번은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 때였습니다. 막내가 꽤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긴 전례 동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음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미사를 주례하는 저는 하나도 괴롭거나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 존재 자체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저희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도 똑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리저리 좌충우돌하고,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그분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로 기쁘고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아무리 큰 허물과 상처투성이어도, 하느님께서는 그저 넉넉한 미소와 너그러운 가슴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에 꼭 안아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기쁨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는 그저 그런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 중의 친구, 진정한 친구, 절친을 의미합니다. 절친의 의미에 대해서 과거 인디언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 진정한 친구 관계는 절대로 그냥 맺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함을 통해 진정한 친구 사이로 발전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함을 통해 우정은 깊어갑니다.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이의 모든 벽이 허물어집니다.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네 것이 됩니다.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 강점, 경쟁력, 건강 등등 긍정적인 측면도 받아들이지만, 상대방의 약점과 상처, 고통과 결핍, 실패와 좌절까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물의 창조주, 자비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부당한 죄인, 결핍투성이인 우리 각자를 향해 친구가 되자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오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