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요한 16, 5 - 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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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5-06 | 조회수27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16,7) 제 삶의 여정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픈 날은 누이와 엄마가 떠나간 날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벌써 50년도 넘었지만, 누이가 떠날 때는 정말 마음이 슬펐으며, 엄마 돌아가실 때는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아렸습니다. 인생은 會者定離 라는 말처럼, 인생은 만남이 있으며 헤어짐이 있고, 태어남이 있으면 죽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떠나보내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황망하게 떠날 줄 몰랐기에 더욱 마음이 슬프고 아파서 차마 떠나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누이 떠나보내고서는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눈물을, 하지만 엄마 떠나보낼 때는 그 슬픔과 상실의 아픔이 제 삶과 신원의 밑뿌리를 흔들 만큼 충격이 컸습니다. 참 오래도록 방황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엄마 돌아가시고 눈물로 지새우던 7개월 후 성직자 · 수도자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으며, 그 세미나에서 어느 수녀님의 죽음은 완전한 치유이다, 는 말 한마디가 저의 마음 깊이에 뭉쳐 있을 뿐, 풀어지지 않은 슬픔과 아픔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엄마의 떠나가심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엄마를 편안히 제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던 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집착 곧 변명이었으며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엄마의 죽음보다 엄마에 대한 이기적인 제 사랑의 집착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저에게는 아주 귀한 날을 맞아 책상 위 빛바랜 엄마 사진을 보면서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때늦은 후회가 되살아납니다. 하지만 저보다 주님은 제 어머니를 더 잘 아셨고 사랑하셨나 봅니다. 당시 어머니가 겪으셨던 고통은 육체적인 아픔이 아니라 자식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심리적이고 영적인 아픔이었습니다. 사제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야 하는 많은 십자가의 무게로 힘겨워하셨기에 주님께서는 모든 삶의 묶임과 짓눌림에서 자유롭게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당신 마련한 거처로 제 어머니를 불러 가셨습니다. 치유해 주시고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저는, 마치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방에서 기도하던 중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려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듯이, (사16,22~34참조) 저 역시도 죄책감과 사랑의 집착이란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를 제 마음에 붙잡아 두려던 집착에서 풀어드리고 놓아버리자, 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낳아주신 엄마에게 집착함에서 벗어나 영적인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시선을 돌릴 수 있었고 하느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표현처럼, 어머니는 떠나야 했고, 어머니가 제 곁을 떠남으로 생긴 빈자리를 받아들일 때 새로운 차원에서 어머니께서 저와 늘 함께하고 계심을 더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는 있음에도 함께 있지 못했지만, 떠나가신 다음에는 ‘아니 있음’으로 함께 할 수 없지만 늘 함께 있음을 더 강하게 느낍니다. 제 어머니는 제 마음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내가 떠나는 게 더 이롭다.” (16,7) 라는 말씀을 저는 이렇게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인간적인 시선에 볼 때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현존하시기를 바라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현존, 여기 지금 함께 계심’에 집착하기보다 ‘주님의 부재, 여기 아니 계심’에서 참된 믿음의 성장과 영성 생활의 심화를 더 강하게 체험할 수 있으며 체험해야 합니다. 또한 부재 가운데 현존을 의식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가르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고 봅니다. 주님의 부재는 성령의 현존을 향한 열림이며, 성령의 오심은 주님의 떠나심을 위한 발판입니다. 여기 아니 계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여기 저희와 함께 계십니다. 떠나신 분이 오히려 더 가까이 계시기 위해서는 육의 떠남과 영의 오심이 필요했고, 이것이 곧 떠남이 가져다준 이로움이라고 봅니다. 오셨기에 떠나셨고, 떠나셨기에 하늘에 우리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시고 다시 오실 것임을 믿습니다. ‘여기 지금 아니 계심’으로 낙담하고 근심하기보다 ‘어제 함께 계셨음’에 감사하며 사랑받았던 추억을 마음에 새기면서, 떠나시면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보호자이신 성령을 우리 마음에 초대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늘 함께 계시면서 세상의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16,8) 바로 잡고 진리와 자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여 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리고 가정이 오늘 ‘바오로와 실라스’가 간수에게 들려준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16,3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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