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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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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07 조회수435 추천수5 반대(0)

알고 싶은 가톨릭 신학을 읽고 있습니다. 조한규 신부님이 교우들을 위해서 집필하였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꼭 알아야 할 교리와 신학을 교리 교사가 학생에게 알려주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한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교회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 교회를 보게 됩니다. 교회의 건축도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모던, 현대에 이르면서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아름답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건축물을 의미합니다. 박해의 시기에는 지하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앙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고, 신심활동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듯이, 교회에서 영적인 힘을 얻은 교우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얻습니다. 사목자와 수도자들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도록 공동체로부터 선발되었습니다. 사목자는 성사를 집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교리를 가르칩니다. 수도자는 세상에서 하느님나라의 삶을 증거합니다. 수도자는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 줍니다.

 

교회는 제도의 모습도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베드로로부터 이어오는 교황을 중심으로 제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수호합니다. 교황은 지역교회의 주교를 임명합니다.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사제를 임명합니다. 사제들은 주교의 권한에 의해서 본당으로 파견됩니다. 수도회는 교회로부터 인준을 받습니다. 인준된 수도회는 각자의 영성과 은사에 따라서 복음을 전합니다. 교육, 나눔, 기도, 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본당의 요청이 있으면 본당으로도 수도자를 파견합니다. 교계제도에 따라서 사제는 교구에 속하게 됩니다. 저는 서울대교구에 속해 있지만 댈러스 교구의 요청에 따라서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도 사는 지역에 따라서 본당에 속하게 됩니다. 이를 속지주의(屬地主義)라고 합니다. 본당에서 영적인 도움을 받고, 본당을 위해서 봉사하고, 재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헌금, 교무금은 본당 재정의 중심입니다. 교계제도에 따라서 모든 본당은 같은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십니다. 지금은 그 나라의 언어로 미사를 봉헌하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는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교회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이지만 정확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회를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사인 교회는 성부의 사랑으로 계획되었고, 성자의 파견과 활동으로 세상에 설립되었으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삼위일체로부터의 교회는 무슨 뜻일까요? 첫째, 교회는 삼위일체의 친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는 일체로 친교와 사랑을 나누시는데, 이는 교회의 원래 모습, 건립 이유와 목적이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성자와 성령의 파견을 통해 교회의 신비가 구현되고 완성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분의 뜻을 실행하도록 노력합니다. 성부가 성자를 파견하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파견되었습니다. 여기서 파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높낮이가 있는 종속적인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치와 사랑과 친교로 이루어진 파견입니다. 셋째, 인간과 친교를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인격적인 친교 의지가 교회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보다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만나고, 체험하고, 구원 은총을 받는 곳입니다. 교회는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계획되었고,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들 각자의 복음서를 가지면 어떨까? 가브리엘 복음서, 안드레아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로사 복음서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사가처럼 깊은 영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처럼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루가 복음사가처럼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도전은 그리스의 철학, 로마의 법, 페르시아의 문학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신화와 종교의 틀을 벗겨버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가치와 의미를 빨아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의 사고는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푸른 별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태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눔의 복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오늘 막사랑에 빠진 것처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직 지금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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