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189-198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제2부 내맡김의 비법과 진리 18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 2010. 04. 16.
얼마 전, 과거에 내 추천서를 받아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부가 된 어느 신부가 이런 질문을 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많이 있는데 왜 내맡김의 영성이 최고인가요?”
내맡김의 영성이 이러저러하기에 참으로 탁월한 영성이라고 대답을 해 주었다.
그 신부의 질문을 계기로 또 다른 분들이 그런 질문을 해 올 경우, 누구에게나 간단히 잘 설명해 줄 수 있도록 거룩한 내맡김 영성에 대한 글을 정리해 보았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이 저마다 자신의 영성이 탁월한 영성이라 생각하여 수도 공동체를 세워 나름대로의 여러 수덕 방법과 기도 방법을 내세우고 펼쳐 왔는데, 내맡김의 영성이 왜 하느님과 일치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 말하는가?”
하느님을 향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에는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접근 방법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만이 꼭 유일한 접근 방법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께 나아가고 그분과 일치하는 데에 ‘거룩한 내맡김 영성’만이 꼭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우리 교회 역사상 참으로 훌륭한 많은 성인들께서 그분들의 삶으로 이미 우리에게 직접 증명해 보여 주셨다.
어떤 분은 순교로써, 어떤 분은 고행으로써, 어떤 분은 수덕 생활로써, 어떤 분은 기도 생활로써, 어떤 분은 자선 사업으로써, 어떤 분은 교회 학자로서 말이다.
성인들께서는 저마다 자신이 처한 각기 다른 삶의 조건 속에서 오직 모든 것을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심으로 하느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증명해 보여 주셨다.
성교회에서 성인들을 추대하여 후손들이 그분들의 삶을 본받도록 추앙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분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신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나 용기나 덕행이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가르침이나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지 않았다면 성인으로 추앙되지도, 추앙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듯이, 신앙생활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信仰이란 ‘하느님을 앙모(공경과 사랑)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최고, 최선의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께 나아가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길이 아무리 많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그 모든 길의 공통적 요소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과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가장 사랑하는 길이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사는 것’을 우리에게 바라고 원하실까? 여러분 각자가 개인적으로 답을 내려 보시기 바란다.
순교가? 고행이? 수덕 생활이? 관상 생활이? 자선 사업이? 희생적 생활이? 이러한 생활들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하느님께 나아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모든 길, 모든 방법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말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 이것 하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특히 “당신의 모습으로”(창세 1,27) 사람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참 좋아하셨다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꼭 드셨다’는 말과 같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과 같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릴 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늘 헤아려 드린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뜻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 이것밖에 다른 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창조 목적’이다.
훌륭한 성인들이 행했던 저마다의 방법들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결과’들이다. 그 방법대로 살기 위해 성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척 힘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살면 힘이 덜 드는 것이다. 성인들도 순리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힘들게 사셨던 것이다. 먼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했다면, 그리하여 하느님께 먼저 내맡기셨다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 수 있었기에 그렇게 힘들게 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훌륭한 성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몰랐을까? 그렇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성인들도 처음엔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하느님께 내맡기면 순교를 하든, 고행을 하든, 수덕 생활을 하든, 자선 사업을 하든, 희생 생활을 하든,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하려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만 살면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살아 주시기에 설령 힘이 드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힘이 들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1요한 4,19 참조),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순리’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성인들도 많을 것이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뜨겁게 사랑하면, 힘든 일도 그렇게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때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이 있으셔서 일부러 큰 어려움을 주시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랑은 힘든 것이 아니다. 진실한 사랑은 때로는 힘들어도 행복하다.
하느님은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사람은, 그 사랑을 닮은 ‘작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큰 사랑’이시다.
작은 사랑은 큰 사랑을 본받아 점점 커져야 한다. 작은 사랑이 큰 사랑이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을 큰 사랑에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서로의 사랑을 믿고 내맡길 줄 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랑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샘솟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지 못하는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며, 그러한 사랑에는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 절망’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참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의 ‘참주인’이시다.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분께 내맡기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분께 내맡기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신다.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다.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신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둔다.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다 내맡길 수 있다.
가끔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을 ‘구속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서로에게 구속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서로에게 묶이고 구속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운 삶’이다.
사랑으로 서로에게 묶이길 원하지 않는 사랑은 ‘거짓 사랑’이다. 거짓 사랑은 무책임하다. 일시적이다. 끝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자유의 근원이신 당신의 ‘참사랑이라는 자유’에 묶이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원히 행복하게 책임져 주신다. 끝이 없다. 영원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자기 뜻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안다. 서로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이다.
‘거룩한 내맡김 영성이 왜 탁월한 영성인가?’에 대한 답은 ‘사랑’에 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다른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면 정말로 감사하겠다. 사랑만이 답이다. 정답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유능하고 특별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더 유리하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살아 주신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하라, 하지 말고 하라! 하지 마라, 네가 하지 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 없이 살라! 살지 마라, 네가 살지 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http://cafe.daum.net/likeamaria (다음 "마리아처럼" 카페 바로가기) 이해욱 신부님의 책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가 출간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참으로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사는 것, 즉, <거룩한 내맡김 영성>의 삶입니다. 책 구입 문의: '끊임없는 기도모임' 카페 http://cafe.daum.net/Praywithoutceasing 구입처 *** 1.직접 구매 가능 성바오로 서원 ☎ 02 945 2972 ※지역 성바오로 서원 (부산 , 대구 , 청주 , 제주 , 수원 ) 2.끊임없는 기도모임 사무실 (명동 가톨릭회관 333호 ☎ 070-7785-3330) 3.온라인 구매 성바오로인터넷 서점 (https://paolo.kr)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