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7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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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5-21 | 조회수21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마르 9,30-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특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당신께서 앞으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그 중요한 순간이 다른 이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게 하시려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신 겁니다. 당신께 대한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제대로 여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 부활이 지닌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함을 깨닫지 못한 채, 박해라는 힘겨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로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셨기에,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고자 하신 겁니다.
스승이신 주님께서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셨으면 그분 말씀이 지닌 참뜻을 하나라도 더 알아듣기 위해 노력해야 할텐데, 그들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분께 묻는 것마저 두려워하지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예수님의 뜻과 계획이 자기들이 바라는 것과 다를까봐, 그래서 자기들이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다 무너져버릴까봐 두려웠던 겁니다. 마치 자신을 대하는 연인의 태도가 냉랭하게 바뀐 것을 보고, 그의 사랑이 싸늘하게 식었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챘으면서도, 그에게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가는 헤어지자고 말할까봐 두려워 묻지도 못하고 속만 태우는 모습과도 비슷하지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눈가리고 아웅’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뀔까요? 차마 끝내지 못해 억지로 연장되는 식의 관계가 과연 서로에게 유익할까요?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 실망과 상처들만 더 쌓여 그나마 아름다웠던 추억들까지 희석되고 말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의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혼자만의 막연한 기대와 바람 속에서 안주하려다 스스로를 슬픔과 절망 속에 빠뜨리지 말고, 주님의 마음과 뜻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마주하고 제대로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내 안에 온전히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바람직한 마음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자세를 ‘어린이 하나를 당신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으로 설명하십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무능하고 힘 없는 이, 그래서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는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된 작고 약한 이를 사랑과 호의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요. 또한 그것이 자기 의로움을 과시하거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 뜻을 따르기 위해서하는 순수한 행동이라면, 하느님은 그런 나를 어여삐 보시고 당신 나라에서 ‘첫째’로 들어높여 주십니다. 그 출발점은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나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래?’라고 판단하지 말고, ‘뭔가 사정이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줄 수 있다면, 그를 주님의 이름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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