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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마르코 9, 38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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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5-21 조회수210 추천수2 반대(0) 신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9,40)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처음부터 마지막 게임까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가자들이 게임에 참여합니다. 참가자들이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삶에는 게임과 비게임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삶은 게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쫄려도 편먹기’에 가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편이 살아남기 위해서 줄을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가혹한 처지는 단지 오징어 게임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네 삶의 현실입니다. 이런 편먹기는 유익함도 있지만 무익함 또한 공존합니다. 내 편 아니면 반대편으로 나누는 편먹기는 자기와 자기 편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편을 전멸시켜야만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상생하고 공존할 수 없는 세상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암담하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위로되는 것은 편먹기의 난장판에서 편먹기에 가담하지 않은 대다수의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를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9,40)라는 말씀이 어찌할 수 없는 어둡고 힘든 상황에서 한 줄기 빛처럼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며, 조금은 숨통이 트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전 맥락에서, 제자들이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9,28) 라고 묻자,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9,29)라고 질책당한 제자들이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믿음과 기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수용하기보다는 어쭙잖은 자존심을 내세워 마귀를 쫓아내는 다른 그룹의 사람들에 대한 시샘과 질투를 드러냅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9,38)라고 자랑하듯 보고합니다. 요한을 포함해서 제자들 모두 참으로 옹졸하기 짝이 없는 한심한 인물들입니다. 어찌 그들만이 그러했습니까? 지금도 편먹기에 앞장서서 그렇게 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도 많지 않나요. “아버지, 모두가 아버지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고 하면서.

요한처럼 많은 사람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고 말하면서, 자신들과 다른 그룹이나 다른 공동체 사람에게, ‘스승님의 이름으로 행하지’ 말라고 말하고 막는 것은 선을 넘은 행위이며 자가당착입니다. 이런 추태는 오히려 스승이신 예수님을 욕보이는 치졸한 행위이며 소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다움을 손상한 행위이며, 예수님 제자의 본분을 망각한 처신이며 태도입니다. 물론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초라해진다는 조바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다움은 세상을 갈라지게 하고 분열시키려는 악령의 이름으로 편먹기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지들이란 ‘자기 그룹’에 속한 사람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안에는 세상 종말까지 어쩔 수 없이 밀과 가라지가 공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앞장서서 편먹기와 편 가름에 나서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전 단락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37)라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과 모든 점에서 다른 ‘타인을 받아들임’과 상생과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강조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들었음에도, 앞장서서 편먹기와 편 가름을 하는 작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침묵할 수 없을까요.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듯이, 침묵하는 사람도 우리는 지지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 측면에서 나의 침묵이 누군가에게는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에게 긴 듯 아니고 아닌 듯 긴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런 저를 어느 편에서든지 막지 않겠지요. “ 막지 마라”(9,39) 또한 서울 오고 가면서 ‘우리들 교회’에 내 건 현수막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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