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10,29~30)
흔히 우리가 자주 쓰는 ‘때문에’는 의존 명사이므로 문장 맨 앞에 홀로 쓰일 수 없습니다. 사전적으로, 『 ‘때문’은 본디 명사나 대명사, 어미 ‘-기’, ‘-은’, ‘-는’, ‘-던’ 뒤에 쓰여, 앞에 오는 말이 뒤에 오는 일의 까닭이나 원인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과관계를 나타낼 때, 때문에란 표현이 자주 쓰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언뜻 자연스러워 보여도 때문에란 표현이 자칫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배우자나 자식 때문에, 어떤 정치가 때문에, 어떤 교사와 학부형 때문에 등. 그런 점에서 어떤 분은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덕분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과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입니다. 세 음절의 엇비슷한 말이지만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덕분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의 표정은 밝고 둥근데, ‘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사는 이의 표정은 어둡고 모가 나 있습니다. 덕분에는 감사와 긍정과 포용을 낳고, 때문에는 불평과 부정과 분란을 낳으니 당연지사입니다. 그렇습니다. 덕분에를 입에 달고 살면 감사와 자족감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불어나 삶이 즐겁고 평안합니다. 반면에 ‘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살면 작은 틈이 둑을 무너뜨리듯 일과 관계가 꼬이고 부실해져 삶이 힘들고 피폐해집니다. 똑같은 결과를 두고 어떤 이는 당신 덕분이라고 고마워하고 어떤 이는 당신 때문이라고 투덜댑니다. 저도 한때는 ‘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살아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잦은 수술 후, ‘이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제 삶은 온통 ‘덕분’이었습니다.
어제 복음의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만남과 대화가 원인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그 결과, 보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과 만남에서 밝히신 대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10,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10,28) 하고 자랑하듯 표현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10,29-30) 라고 응답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라고 강조한 의도를 헤아리지 못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시련과 박해을 겪을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라고 원망하며 살아갔거나 떠났을 겁니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를 입에 달고 원망하며 살았던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한 현세에서 누릴 상급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보상을 믿지 못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며 꼴찌가 되었을 겁니다, 반대로 ‘주님 덕분에’라고 입에 달고 살았던 제자들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 세상에선 성인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내세에선 분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내세에서 첫째가 되어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를 재차 강조한 의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우고 깨닫도록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8, 36.35) 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란 표현의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사용을 희석시키고, 승화해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사용의 가장 압도적인 표현은 아마도 ‘사랑하기 때문에’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절한 가수 ‘유재하를 유재하’로 만든 「사랑하기 때문에」란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리고 비우며 목숨까지 바친 것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순교를 애덕의 완성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의 성인 성녀들이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진 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입니다. 사랑하면 비록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 때문에 ‘당신의 나’이길 바랄 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가사를 음미하길 바랍니다.
『 (...)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 해도 조용히 따르리 오 어제는 지난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를 대신해서 아빌라는 데레사의 기도를 보냅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