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10, 51. 5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예리코는 마지막 길목입니다. 이곳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중요한 일과 가르침이 있었지만,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영적 맹목盲目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영적 장님과도 같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적 거울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예리코의 길목에 앉아 있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와의 예수님의 만남은 십자가 여정에서 제자들에게나 우리에게 전환의 순간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한 제자들과 보지 못하고도 볼 수 있었던 바르티매오의 차이는 곧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아픔과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 곧 시각장애인이자 동냥하는 사람이면서 이름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르 티매오’란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니, 이 사람은 어엿하게 존재하면서도 그 자신의 정체성의 상징인 이름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예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민중 역시 이름 없는 존재들이 많았습니다. 사극 <역적>의 주인공 ‘길동’의 아버지 이름이 ‘아모개’였고, 어린 여동생의 이름이 ‘어린이’ 이였듯이 말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는 눈이 멀어서 볼 수 없었고, 구걸하여 먹고 살았으니 예수님 당대에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어떤 누군가의 적선에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또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기에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주저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0,47)하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한 푼만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기에, 사실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여정은 마지막 여정이었으니 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더니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힘을 내라고 격려하듯이 그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10,49)라고 말해줍니다. 그를 가까이 부르신 까닭은 단지 돈 몇 푼을 주려고 부른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10,51)
이 질문에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함축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는 질문은 이미 바로 앞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제배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10,35참조)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10,37)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모른다.” (10,3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바르티매오는 복음에 기록된 대로 구걸로 생계를 꾸려가는 전업 거지(?)였다면, 제베대오의 형제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걸하는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10,42참조)를 구걸하는 고급 거지, 상거지와 같았습니다. 어쩌면 마르코 사가는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이야기 뒤에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누가 참 제자인지, 누가 참으로 눈먼 거지인지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된 제자이고 눈먼 거지였던 바르티매오의 변화 과정을 좀 더 세심하게 살펴봅시다. 우선 먼저 그의 첫 번째 변화의 조짐은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외친 순간이 바로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순간이 바로 변화의 첫 순간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지만, 더욱 큰 소리로 외치고 예수님이 그에게 관심을 두고 주목하자 사람들 역시 변하기 시작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라,고. 이에 따라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10,50) 바르티매오가 벗어던진 ‘겉옷’은 그동안 그를 옭아매어 왔던 모든 것, 옛것, 낡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의 장애, 가난, 신분 등으로 덮어씌워진 운명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그는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벌떡 일어납니다. 즉, 죽음과도 같은 옛 상태에서 부활의 새로운 태어남으로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예수님의 질문에, 당당히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0,51)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화답하듯이 예수님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0,52)라고 그의 간청을 들어 치유해 주십니다. 이로써 그는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시 보다.’는 단어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제게 먼저 다가오는 뜻 중에서,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를 통해 제자들은 물론 우리 역시도 바르티매오처럼 다시 눈을 떠, 새로운 시선으로, 땅의 일을 보지 않고 하늘 일을 보고 살아가는 우리로 거듭 태어나길 바랍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고 말씀하신 배경엔 이젠 ‘너의 길’, ‘너의 삶’을 살면서 너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위, 하늘을 보는 삶, 하느님의 뜻을 사는 길을 가도록 촉구하시고 격려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이 순간 마지막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나섰다.”(10,52)하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일행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고 살아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보게 됨’으로 걸어야 하고 살아야 할 삶입니다.
“주님 보고도 보지 못하며 살아가는 저희, 듣고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희를 질책하지 마시고 오늘 복음의 바르티매오처럼 다시 보고,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낫게 하여 주시길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