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날마다 어딘가를 향해 떠나며,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씁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몸짓 안에 담겨 있는 생각과 의식은 무엇일까요? 이 움직임 안에 행복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면 삶을 한번쯤 깊이 되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떠나지만 왜 떠나며 무엇을 얻기 위해 떠나는지, 시간과 돈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모두의 선을 위한 것인지 복음에 비추어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10,28)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현세에서 백배의 보상을 받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29-30). 이처럼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세적인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고, 늘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보상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며 항구히 추종하라는 새로운 부름인 셈입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히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고통과 박해가 따르는 만만치 않은 길이었지요. '예수님 때문에’(10,29) 자신을 떠나서 지혜이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만이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추종하려면 제자들이 부모와 형제, 토지를 모두 버렸듯이 어려움과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법적인 포기가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애착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떠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자체가 영성생활의 종착점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이요 하나의 매듭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에 어긋나는 온갖 애착을 버리는 갓입니다. 그러려면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으로부터 떠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보상은 이런 떠남과 떠남에 따른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맺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부의 뜻을 따라 죽기 위하여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 떠나셨고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포기하셨지요.
자기 것에 애착하고 소유의 끈을 놓지 못하며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을 맞으면 그 누구도 티끌 하나도 지니지 못한 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사람답게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죽음을 위해, 지금 여기서부터 애착을 버리고, 자신을 떠나 하느님께로 향해가는 삶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것만 챙기는 옹졸함, 재물에 대한 집착, 하느님의 주도권을 무시함, 악에 동조하고, 불의에 가담하는 삶,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아무런 준비도 없이 허무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일이 없도록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를 떠나 모두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그분 안에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꼴찌 인생이고 바보짓이고, 박해까지도 각오해야 하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최고로 행복한 인생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진정 소중하고 값진 것을 얻으려면 자신을 떠나 모두를 버리고 되돌려야겠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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