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성 유스티노 주교 순교자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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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6-01 | 조회수24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성 유스티노 주교 순교자 기념] 마르 11,27-33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 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당신이 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그런 일을 해도 되는 ‘권한’을 대체 누가 당신에게 주었느냐고 따져 묻지요. 예수님 시대에 수석 사제들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율법에 의해 성전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을 관리하고 결정할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인 ‘성전세’를 자기들 몫으로 챙겼고, 사람들이 제물로 쓸 동물들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에게 장사권을 팔아 엄청난 이득을 챙겼지요. 그런데 난데 없이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서 팔아야 할 동물들을 다 쫓아내버리고, 환전상들의 가판을 뒤엎어 버렸으니 그로 인해 큰 손해를 본 상인들이 수석사제들을 찾아가서 따졌을 것이고 그 상황을 해결하고자 그들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간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이 성전을 말 그대로 ‘뒤집어 놓으신’ 예수님의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도 성전 안에서 물건을 파는 행동이, 상인들로부터 뒷돈을 받아 제 배를 채우는 행동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그래도 되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었지요. 그러는 와중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그것을 지은 원래의 목적으로 되돌리는 ‘올바른 일’을 하셨으니 차마 그 일 자체를 문제삼지는 못하고, 권한의 문제를 걸고 넘어진 겁니다. ‘권한’이라는 말에서 ‘권’은 저울을 가리킵니다. 저울은 눈금이라는 지표를 통해 그 대상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를 판별해 내는 도구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하늘의 저울’과 ‘사람의 저울’이 그 눈금이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저울은 그 대상이 지닌 물질적 특성을 바탕으로 그 가치를 판별하지만, 하늘의 저울은 그 대상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얼마나 부합되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판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권한을 들먹이며 따지는 수석 사제들은 세상의 눈금으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셨는지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대신, 우리가 누구의 저울로 세상과 삶의 가치를 판단해야 하는지를, 누구의 눈금으로 옳고 그름을 식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려는 겁니다. 그것을 알면 예수님께서 굳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권한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며 사람들의 죄를 씻어준 요한의 세례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하늘의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늘의 일임을 인정해버리면 예수님의 권한 또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신적인 권한’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솔직하게 답하지 못한 겁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말해버리면 요한을 ‘엘리야’ 혹은 ‘그 예언자’로 여기며 따르는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킬까봐, 그러면 자기들이 지금 누리는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걱정되어서 예수님이 하신 그 행동의 정당성을 대놓고 부정하지도 못합니다. 그놈의 얄팍한 ‘권한’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모르겠소”라는 그들의 비겁한 대답이 나의 가슴을 쿵 하고 내리치는 듯 합니다. 그것이 평소의 내 모습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내 모습에 양심이 찔리는 것이지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양심을 거슬러 예 해야 할 때에 당당히 예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아니오 해야 할 때에 아니오라고 솔직하게 사과하지 못하고, ‘잘 모르겠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어물쩡 넘어가려 드는 나의 비겁함에 제 발이 저린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세상의 저울이 아니라 하늘의 저울에 내 삶을 달아야겠습니다. 세상의 눈금말고 하늘의 눈금으로 옳고 그름을 제대로 식별하고 선택해야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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