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시기를 다시 시작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근원과 목적을 보여 줍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마르 12,14)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던 시절, 그때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임금이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찾아와 임금을 요구하고, 이를 언짢아 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 왕정을 허락하신 이야기를 소상히 전합니다(1사무 8장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당장 눈에 보이고 효력도 확실한 제도와 우두머리를 필요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손수 뽑으신 백성에게 배척당하신 것이지요(1사무 8,7).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그마저 무너져서 로마 제국 황제에게 지배를 받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갔습니다. 이때 종교 지도자들이 눈엣가시같은 예수님께 정치적 올가미를 던지지요. 예수님의 선택지는 로마에 대항하는 선동가거나, 아니면 민족적 반역자, 둘 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예수님의 답변은 이스라엘 왕정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다윗의 자손답게 순수하고 영적입니다. 이스라엘이 까마득히 잊고 있었거나, 종교 행사의 시공간 안으로 축소시켜 버린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환기시켜 주시면서, 동시에 온건하지만 단호하게 어둠의 세력이 품은 흑심과 속셈을 드러나게 만드셨지요.
"황제의 것 ... 하느님의 것"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황제의 것이 존재할까요?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것이 아닌 무언가가 과연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황제마저도 하느님 것이니까요. 또 그에게 생명과 권한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신데 감히 어느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을 주장할 수 있을지요!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날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하도록 신자들을 독려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것임을 아는 이는 세상 재물과 허영에 목메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 곧 황제의 것들은 추구하고 차지할수록 더 욕망하게 되고 달려들게 만드는 마약과 같지요 마시면마실수록 더 목이 타서 계속 들이키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바닷물과도 같습니다. 이 상태에서 평화란 없습니다.
온 생애를 걸쳐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되돌려드리며 살다가 그 순간을 맞는 이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에 평화로이 들어섭니다. 하느님과 그 사이에 이미 주고 받음의 경계조차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것이 모두 그의 것이고 그의 것이 고스란히 그분 것인 차원에서는 소유나 욕망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집니다.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2베드 3,18).
베드로 사도는 그날이 올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권고합니다. 우리가 간직하고 키워야 할 것은 바로 "은총"과 "앎"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은 분명 "받은" 것이지요.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사람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은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지요.
앎은 세속적이고 현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앎을 가리킵니다. 책과 학위와 상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사랑의 지식이지요. 깨끗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님은 당신에 대해서 열어 보여 주십니다. 그렇게 존재를 깨치고 들어온 앎이 사랑이 되어 존재를 차지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 살기 힘드시지요?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도 책임져야 하고 교회와 사회에 의무도 이행해야 하니 마냥 하느님의 것만 추구하며 살기는 어렵게 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등과 노고가 크십니까...
사실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은총으로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을 분별하는 눈이 존재합니다. 때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우리 영혼이 알고 양심이 알지요.
각자 자기 영혼의 저울을 바라봅시다.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 사이에 나의 추는 어디쯤 위치하는지요? 단번에 추를 옮기려다 저울 접시가 뒤집어질 수도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는 마시고, 우리 영혼이 아는 방향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도록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봅시다. 정답은 주님도 아시고 우리도 알지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화답송).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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