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영원한 구원의 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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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05 | 조회수246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11;25.26)
일기쓰듯 쓰는 강론입니다. 어제도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계속 축제같은 아름다운 날씨의 연속입니다. 3월20일부터 시작된 수도원 개인피정집 2채와 수련소 건축이 어제 6월4일로써 끝나고, 그동안 2개월 보름쯤 수고해준 '주님의 형제'이자 '주님의 전사'인 이승용 아오스팅, 이현옥 헤레나 부부는 왜관 고향집으로 떠났습니다. 참 멋지고 아담한 세채의 건물이 볼수록 사랑스러워 자꾸 눈길이 갑니다.
“순식간 지난 듯 합니다. 거의 3개월인데 마치 3일쯤 걸린 듯 합니다. 하루 평균 10여명씩 인부들이 머물렀고 이들의 음식 뒷바라지를 해줬으니 이보다 역동적인 공동체는 없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지만 기뻤습니다. 우리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 해냈습니다.”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떠난다하니 서운한 감정이 들기는 처음입니다. 그동안 하루의 일이 끝나면 끝기도때마다, 또 날마다 미사때 마다 가지런히 앉아있던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 때문에 가족처럼 느껴졌던가 봅니다. 정말 내일처럼 최선을 다함으로 감동을 선사한 참 진실하고 성실한 부부입니다.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일을 끝낸 기쁨이 큰지 흡사 승리의 무용담을 나누는 듯 했습니다. ‘하루 묵었다 내일 갔으면 좋겠다.’ 말했지만 미련없이 오후 늦게 떠났고 저는 부부에게 강복을 주었습니다. 문득 떠남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할 일을 다하고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홀가분한 죽음이겠는가, 비록 두 부부는 떠나서 보이지 않지만 왜관집으로 귀향(歸鄕)하여 살아있듯이, 세상을 떠난 죽음도 그렇지 않겠나,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하여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아침에 강론을 나눌 때 나눈 카톡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맞으심을 축하드립니다. 좋은 피정집을 짓는 아오스팅 형제님! 맛있는 밥을 짓는 헬레나 자매님! 또 좋은 강론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프란치스코 신부! 모두가 하느님 눈에는 사랑스런 당신의 일꾼일 것입니다.” “ㅎㅎ 예 감사합니다.”
그러니 각자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이 영원한 구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하늘나라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쓴 책 서문 내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삶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셨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산 이들은 죽지 않는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이요 역설인가! 물론이다. 죽은 이들은 살아난다. 그러니 우리 산 이들이 죽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얼마나 진실인가! 우리는 영원으로 운명되어졌다(We are destined for eternity)! 우리는 영원을 위해 지음 받았다(We are made for eternity)”
오늘 복음의 부활논쟁에서도 예수님은 친히 부활의 진리를 명명백백 밝히십니다. 새삼 우리의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부활의 삶, 영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는 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중 탈출기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죽은 이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the God of Jacob).’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
새삼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 확신에 넘치는 고백은 부활신앙에서 연유됨을 봅니다. 바오로뿐 아니라 부활의 희망이 샘솟는 내적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죽음을 폐지하시고 생명과 불멸을 환히 드러내신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겠는지요! 바로 이런 빛나는 삶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정말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 순교자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입니다. 그 거칠고 위험한 고난의 삶중에도 80세 전후의 장수를 누리시다 순교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게르만인들의 사도인 보니파시오는 ‘평화의 친구“라는 뜻의 빈프리트라는 이름을 지닌 영국인이었습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되었고, 716년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은 게르만족의 복음화를 위해 그를 선교사로 파견합니다. 교황은 이때 그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보니파시오 이름도 주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정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불가사의의 정력적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유명한 풀다 수도원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교구들을, 수도원들을 설립합니다. 마인츠의 교구장이 된 그는 마침내 프랑스에까지 진출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던중 755년 6월5일 오순절에 현재 네델란드 도쿰 근처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52명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고 풀다 수도원에 묻힙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기립니다.
“독일에서 정치, 교회, 영성의 영역에서 발전한 모든 것은 보니파시오가 놓은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영적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의 후계자들에게 우리의 위대한 황제와 왕들이 기여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성인이 편지 다음 대목도 감동적입니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합시다.”
정말 부활의 희망으로 무장된 ‘주님의 불퇴전의 용사'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였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백절불굴, 주님의 희망의 전사가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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