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가이들이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력화 하려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한 여인이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었다면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12,25)
부활은 현세의 연장이나 육신 생명의 재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변화를 말합니다. 부활은 시간과 공간, 인간의 지식과 감각 세계, 그리고 세상의 질서에 갇혀 있지 않은 하느님의 신비요 은총이지요. 부활의 신비는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오직 성경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12,24) ‘카이로스의 선물’이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한 현재’이며, 부활의 때는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발견해가는 절대적인 시간입니다. 내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 늘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총의 현재’인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여정도, 나의 인생길도 그렇게 하느님의 얼과 호흡 안에서 드러나는 은총의 연속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12,27) 따라서 나의 물리적 조건과 시간,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어, 내 안에 변함없이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요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육신을 지니고 시간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사두가이들처럼 거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알게 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까닭이지요.
사두가이처럼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연연하고 애착을 두게 되겠지요. 나아가 육신의 죽음은 곧 끝이라는 생각과 믿음을 지니게 됨으로써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 너머로 이어지는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도 갈망도 사라져버립니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과 근심걱정과 동거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즐기고 욕구 충족을 하는데 몰두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심각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때에도,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절망하거나 체험해버립니다. 그 안에 보화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신 주님을 추방해버린 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내가 살아가는 순간마다, 내 삶의 모든 계기에 의미가 되어주시고 희망이 되어주시며, 생명을 혼을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내 마음과 혼에 모시고, 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고 체험하여,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보화를 찾아 나누는 희망의 축제, 사랑의 축제를 ‘지금, 여기서’ 시작해야겠습니다. 영원의 선물이 지금 나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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