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준 것보다 더 돌아올 사랑 / 연중 제9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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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6-05 | 조회수19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준 것보다 더 돌아올 사랑 / 연중 제9주간 목요일(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어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가장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분께서 곧장 이르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주 너의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해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이보다 더 큰 것은 정녕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 사랑을 ‘내리사랑’이란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식이 무슨 조건을 갖추었다기보다 당신 자식이기에. 그래서 이 사랑을 도덕적 의무로 규정할 수 없다. 부모로서의 본능이기에 굳이 의무로 정할 필요야. 허나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려면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게다. 하느님의 우리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 우리가 무슨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게 아닌,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에 그렇다. 이처럼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억제할 수 없는 그분의 고유 본능일 게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분을 정녕 사랑하려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마치 그분의 본능마냥.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첫 계명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아예 명령하시는 것이다.
분명한 건 어떤 형태이든 간에 사랑은 축복이다. 온몸으로 다가갔기에 만날 수 있었던 감동을 겪은 영적 체험이니까. 이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다 사랑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하느님 사랑에는 그분께 의당 받은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게다. 그 기억은 기도에서 나온다. 우리는 기도로 하느님과 그분의 자녀인 나와 나의 이웃을 사랑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그분 사랑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다. 이웃을 떠나서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없고, 그분을 떠나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기에.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자연 흘러나와, 나를 거쳐 이웃에게로 흘러가야만 하니까. 사랑은 단순 감정도 값싼 고백도 아닌, ‘본능적 욕망’과 함께한다. 온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으로 체험한 공동체에서의 삶이니까. 사랑은 하느님 그 자체이다. 우리가 그분과 그분께서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이 사랑 속에서 우리 자신의 참된 사랑을 느낄 수 있기에. 이 두 사랑에는 의당 자신 사랑이 내재한다. 이 사랑이 없다면 삶도 믿음도 없고 희망마저도 없다. 오로지 허망한 죽음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도 영원한 삶의 일부라면서 우리를 부활 감동으로 다독이신다. 이 영원을 향한 여정에 우리 앞에 부대끼는 죽음은 한낮 과정이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참으로 삭막한 일 아니랴! 우리가 말로만 온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위선이다. 온 정성으로 그분만을 사랑한다면 모든 사랑은 따라온다. 오직 그분 사랑만을 첫째 자리에 둔다면, 자신의 삶이 분명 달라질게다. 그분께 받을 그 사랑은 준 것보다 더 보태어 돌아오기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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