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9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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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6-06 | 조회수21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마르 12,28ㄱㄷ-34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종종 '신부님 강론 말씀 참 잘 보고 있습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저의 부족한 묵상을 통해 누군가가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영적인 위로와 힘을 얻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보람 있고 뿌듯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들을 때면 마음 한켠에 이런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 좋게 들으신 그 말씀을 얼마나 실천하셨을까?, 힘겹게 깨달아 알게 된 주님 뜻에 비추어 자기 부족함을 채우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들을 하셨을까? 혹시 그냥 ‘읽기 좋은 글’로, 일시적인 마음의 위로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것들은 강론을 쓰는 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지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과연 내가 복음 선포를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는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살기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규정 248개 조항, 절대 해서는 안되는 금지 규정 365개 조항, 모두 합쳐서 613개 조항으로 율법을 세분화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규정들을 일일히 다 기억하고 지키기도 어렵거니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율법 규정들의 내용이 충돌하는 경우도 생겼지요. 그러다보니 어떤 규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하는지 고민이 커졌고, 그런 고민들을 하느라 정작 율법과 계명에 담긴 근본정신과 의미에 대해 성찰할 시간은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는 이런 종교적 배경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인지에 대해 예수님께 자문을 구한 겁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데에만 온전히 집중하면 되는데 자질구레한 규정들에 얽매이느라 정작 사랑의 실천에는 소홀해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그분의 대답이 질문했던 율법 학자에게도 마음이 와 닿았나 봅니다. 율법 규정들 하나 하나에 신경 쓰는 것보다 ‘나의 하느님’을, 내 삶을 이끄시는 단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그분께서 바라시는 ‘옳은 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율법을 글자 그대로만 지키려 드는 ‘문자주의’나 번제물과 희생제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신경쓰는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계명의 근본정신인 ‘참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을 되새긴 것입니다.
그처럼 그가 내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여느 종교 지도자들처럼 고집과 편견에 갇혀 예수님 말씀을 배척하지 않고 귀기울여 듣는 열린 모습에서,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 모습을 성찰해보고 무엇이 부족하며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찾는 적극적인 모습에서 그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확인하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아직까지 가능성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가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깨달은 그 사랑의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때 그는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론을 그저 귀로 듣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은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갈 때 구원의 주인공이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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