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예수 성심 대축일: 요한 19, 31 ~ 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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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6-06 | 조회수19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19,34)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심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마음, 곧 성심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성심은 사랑입니다. 오늘 감사송을 통해 교회는 성심의 사랑을 본받기 위해 구세주의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고 고백하며 찬송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창으로 찔리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신 성심, 사랑이신 그분께 달려가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이 놀랍고 거룩한 사랑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에페소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그분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에3, 17~19)라고 권고하고 독려합니다. 그분의 성심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거룩한 마음, 곧 사랑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 사랑의 길이와 넓이, 높이와 깊이를 깨닫고 알아보셨기에 십자가를 두고,하느님의 지혜이며 힘이라고 역설적으로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 당대도 현재도 십자가는 무능과 약함이 드러나는 장소이며 표지인데, 가장 ‘하느님답지 않음’이 여실히 표출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런 사도 바오로의 맥락에서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십자가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가장 압도적으로 장엄하게 선포되었다고 설교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이런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가 곧 하느님 사랑의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의 대상 앞에 모든 것은 힘을 잃기 마련입니다. 지식도, 학식도, 지위도 심지어 위신이나 체면까지도. 어떤 면에서 인간이 가장 강할 때도 가장 약할 때도 사랑할 때입니다. 하물며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셨을 때, 당신도 침묵하시면서 아드님과 함께 당신 성심도 어리석게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고 있는 “하느님이 사랑에 빠지시면 현명함을 상실하신다.”라는 표현이 결코 말장난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빠지셔서 하느님다움을 감추신 채 하느님 사랑의 역설, 곧 지혜이며 힘이 드러난 사랑의 사건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가장 잔인하고 혹독하며 나약함과 비천함의 상징인 십자가로부터 하느님의 하느님다움 곧 사랑의 지혜와 힘을 드러내 보이셨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에, 3,9) 혹여 여러분도 저처럼 아름다운 글, 감명받은 내용의 글을 보관하나요? 예전「매일미사」에 실렸던 글입니다. 『 ‘시래기죽을 먹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식사 시간만 되면 상을 차려놓고 슬그머니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고, 우리 여섯 남매는 시래기죽을 서로 차지하려고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숟가락을 부산히 움직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배가 아프다며 나가시던 어머니는 애꿎은 아궁이만 휘젓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식이 굶어도, 병들어도, 월사금을 못 내고 풀이 죽어도 어머니는 모두가 당신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이고, 식구가 너무 많은 탓이고, 피난살이 하던 모든 어머니의 공통된 설움이건만, 유독 어머니는 모든 것이 늘 당신의 죄 탓이라 고 하셨지요. 이제 그때의 어머니의 나이가 된 지금 되돌아보면,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셔서 죄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습니다.』사랑이 많으면 죄가 많은 법이라니, 예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땐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조금은 알아듣습니다. 사랑이 많으면 모든 것이 다 자기 탓이라고, 그래서 이 글을 쓰셨던 분의 어머니도 그리고 우리 각자의 어머니들은 참으로 죄가 많았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또한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셨기에,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창에 찔리시어 어쩔 수 없이 죽어가면서도 당신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로, 우리를 사랑으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찔린 심장은 단지 예수님의 심장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심장이었고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은 바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 곧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호세아 예언자는 사랑이 많아 죄가 많은 어머니의 절실한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배고플 때 젓 먹여 주시고, 걸음마를 배우면서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워 주시고, 아플 땐 밤새 곁에 머물면서 아픈 데 손으로 쓸어주고 품어 안아 주셨지만, 우리는 그 모든 사랑을 잊어버리고 알지 못했으며, 품 안에 자식이라더니 배신하였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잊어버리고 돌아섰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이 많은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이 다 당신 탓이려니 생각하셨기에 분노를 터뜨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다짐하십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11,9) 당신 스스로 사랑임을 선언하셨던 대로 십자가에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 다시 한번 사랑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와서 보라! 열린 심장을 그리고 그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는 단연코 마르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을 죄를 씻어내는 생명인 세례성사와 구원하는 사랑의 성체성사로 세상 끝날까지 지속할 것입니다. 거룩한 예수님의 성심을 찬미하면서 성가 「주의 성심 홀로, 성가 204번」을 기도로 바칩니다. 『 허다한 마음 중에서 예수 성심 홀로 우리의 걱정 알고 위로해 주시네.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희생하여 죄에서 구했네. 죄악에 기운 맘에 새빛을 주시어 새로운 삶을 찾아 나가게 하소서. 인자한 주의 팔이 미치는 그곳엔 온갖 세상 풍파도 두려울 것 없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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