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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반영억 신부님_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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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09 조회수273 추천수2 반대(0) 신고

 

소위 ‘열심하다’ 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유혹을 받아 봐야 자신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대를 통해서 거듭 태어날 기회를 챙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활동 초기에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일행 주변에는 항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들 수조차 없다는 없다는 소문이 있었고 심지어 “미쳤다‘는 소문까지 떠돌았기에 친지들은 사람들이 수군덕거리는 것이 듣기에 거북해서 붙잡이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곱지 않게 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마르3,21). 혹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3,30)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비딱한 시선은 당시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누려 왔던 율법적, 영적 권위가 약화 되는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 헛소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본모습이 드러나듯이 험담은 험담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 놉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3,30).

 

물론 주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로 죄를 범하고 그것으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행위,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어둠에 머물게 되고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의 영원한 죄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마음이 비뚤어져 하느님께 속한 자비와 사랑, 용서를 고의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벌은? 스스로 거부하여 자비와 용서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두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혈연을 떠나 이미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이는 구원 활동과 가르침을 배척하는 적대세력과 구별하여 은총을 누리기 위해 모여든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말씀입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뒤로 밀쳐질 처지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섭섭한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군중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요, 누이요, 어머니의 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 가족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정복하는 것보다는 섬기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내어주는 사랑으로 가족애를 돈독히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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