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6월 10일 / 카톡 신부 | |||
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6-10 | 조회수21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 5,1-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찾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행복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참된 행복의 조건들은 하나 같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 뿐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고 자비로우며, 박해를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런 이들은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게 것입니다. 행복보다는 불행에, 슬픔과 절망에 더 가까워보이는 겁니다. 꼭 그런 처지가 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면 굳이 행복해질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래 의미는 ‘축복 받았다’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의미가 좀 달라집니다. 행복과 축복은 그 의미가 다를 뿐 아니라 각각의 상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주체도 다르지요. 행복은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만족을 느끼는 것”을 뜻하며 그 상태를 만드는 주체가 인간입니다. 그러나 축복은 “복을 내리는 것”을 뜻하며 그 주체가 신적 존재 즉 하느님입니다. 즉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엔 ‘행복’하기 어려운 안좋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라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면 ‘축복’받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행복을 자기 만족에서 찾으며 그 조건을 외부에서 채우려고 합니다. 다른 이들이 최고라고 여기는 재물, 명예, 권력 등이 그 조건이 되지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양심을 속이기도 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누리는 진정한 복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게 되면, 세상의 것들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기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것들입니다. 재물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영적 가난,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죄를 저지르고 마는 자기 처지에 대한 슬픔 어린 탄식, 하느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순명하며 따르는 온유함, 숫자로 드러나는 조건의 평등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공평함과 공정함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지혜로움, 남들이 겪는 슬픔과 아픔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며 돕고자 하는 자비심,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느님 뜻에 맞는 의로움을 따르고자 하는 굳센 용기... 하느님께서는 이런 미덕을 지닌 이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복을 내리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각각의 복을 내리시는 ‘시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다른 축복들을 받게 되는 건 미래의 어느 때, 즉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축복은, 즉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 안에서 살게 되는 축복은 ‘지금 즉시’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그 때부터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얼마나’ 받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믿음’에 달려있다면, 우리가 그 복을 ‘언제’부터 누릴 수 있는가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