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주님의 참 좋은 제자들이자 선교사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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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11 | 조회수176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성 바르나바 사도...”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 믿는 이들의 이중신원입니다. 안으로는 제자이자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 역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을 사랑했던 주님의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바로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러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지난 주일 가톨릭신문 20면은 성미술 작가 조광호 신부의 고백과 같은 글이었고 일부 소개합니다.
“저도 교회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했어요. 회화외에도 조각과 판화, 스테인글라스등 필요한 것들을 배우면서 작업을 해요. 컴퓨터 그래픽도 배웠어요. 특히 스테인글라스의 경우는 당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동검도 채플’은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제가 받은 은총을 내놓기 위해서 만들었죠. 교회에 봉헌한 제 삶을 모두 모아 작은 경당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놓기 위한 곳이에요. 24시간 열려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로, 누구나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울 때,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성 바르나바 사도처럼, 역시 교회와 주님을 사랑한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인 사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볼 때 다산 정약용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교회의 사람, 주님의 사람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도 공감합니다. 한결같이 진리를 깨달은, 삶의 지혜가 농축된 말씀입니다. 진리의 사도라 해도 좋을 다산입니다.
“비범한 진리는 찰나의 깨달음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축적된다. 궁리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며 만가지 변화를 섭렵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행하는 도리를 헤아려 말없이 마음속에서 살피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길을 놔두고서 굳이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생을 노력으로 착각하지 말라.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만들어진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거친 돌길이나 우거진 덤불속을 헤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특정 지역에 그리그도교를 전한 대표 선교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사도라 부르고, 성치릴로와 메토디오를 슬라브 민족의 사도, 성 파트리치오를 아일랜드의 사도라 부릅니다. 또 더 넑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우리를 주님의 사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바르나바가 ‘격려 또는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 뜻대로 얼마나 신도들을 잘 격려하고 위로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어지는 내용도 그가 얼마나 교회에 충실한 인물인지, 또 사울에 대한 최선을 다한 노력에서 얼마나 좋은 배려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고, 바르나바의 편지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사도가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5세기에 쓰여진 ‘바르나바의 전도 여행과 순교’에서는 키프러스 섬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우선적 목표가 하늘나라의 선포요 이와 더불어 치유활동과 구마활동입니다. 이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명합니다. 이미 예수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이 각처에 있어 제자들을 영접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흔연히 나그네를 환대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무소유의 자유롭고 홀가분한 선교 여행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참 좋은 보답은 주님 평화의 선물입니다. 무소유와 무욕의 자유로운 삶을 통해 그대로 주님 평화의 통로가 됐던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의 두 연설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제6차 국제 젊음이들의 성가대들 모임에서 성가대원들에게 한 연설로 그들의 섬김의 활동에서 세가지 본질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형성에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첫째, 조화(harmony)입니다. 교황님은 “음악은 조화를 창조한다. 그것은 누구에나 전달되어 고통중인 이들을 위로하고, 좌절한 이들의 마음에 열정의 불을 붙인다. 음악은 하느님의 조화로운 빛을 반영하는 아름다움과 시같은 경이로운 가치들을 사람들 마음에 가져다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친교(communion)입니다. 교황님은 “합창은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와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여정은 위대한 ’연주회(concert)’의 향기가 될 수 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면서 ‘친교의 교향곡’(thy symphony of communion)’안에서 각자 고유한 풍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강조했습니다.
셋째, 기쁨(joy)입니다. 교황님은 “여러분은 예술, 아름다움, 영성의 오랜 보물의 관리인들이다. 이기심, 야망, 질투, 분열로 더러워진 세상적 정신상태가 너희들 안에 스며들지 않도록하라. 너희 음악은 점차 하느님께 자기증여의 기쁨이 될 수 있고, 그분의 사랑과 더불어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밝히고 모든 것을 변모시킬 것이다. 너희는 성 아우구스티누의 권고를 채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혀로,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우리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자.' ”
새삼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조화, 친교, 기쁨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는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는 교황청의 대사들 모임에서 한 연설인데 세부분으로 된 명연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첫째, 가정(family)입니다. 교황님은 “교황대사들은 인류가정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 우선적 자리에 사랑과 형제애, 함께와 나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놓고 이를 살아내고 전수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하늘나라 가정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분열과 전쟁으로 파괴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둘째, 희망(hope)입니다. 교황(pope)이란 단어가 흡사 희망(hope)처럼 들립니다. 교황님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우리는 좌절하거나 비관적이 냉소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희망은 우리 세상 안에 현존하는 좋음을 인정하고 우리 시대의 도전에 직면할 힘을 마련해 준다. 이런면에서 여러분들은 희망의 표징들이 되어 달라.”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평화(peace)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는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 안에서 타인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관계의 열매다. 우리가 무관심과 두려움을 제쳐놓을 때, 성장하고 번영하는 영구한 일치로 이끄는 상호 존경의 진정한 분위기도 피어날 수 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peacemakers)이 되도록 노력해 달라. 전능하신 분이 축복하신다” 라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형제애, 희망, 평화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 역시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점차 우리 모두를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우리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로, 즉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 그리고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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