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오직 사랑으로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마태 5,17-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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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6-11 | 조회수13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오직 사랑으로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마태 5,17-19) ‘그때에 예구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게다.”하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실 율법에 충실한 게 하느님과 이웃 사랑인 만고의 진리라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법을 운용하는 자의 그릇된 판단으로 그 본래의 의미가 많이 왜곡 변질된 게 현실일 게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사랑 정신을 저버리는 율법을 완전 무시해 없애 버리겠다는 게 아닌, 오히려 완성하고자 오셨단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근본정신이 반드시 준수되어야 함을 무던히도 강조하시었다. 폭군들과 독재자들은 그 잘난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사리사욕만을 채우면서 자리보전에만 급급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무서운 법을 사랑의 율법, 정의와 평화 실현의 법으로 완성하시겠단다. 이는 율법 본래를 회복뿐만이 아닌, 당신 ’자비‘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지 말라는 법’을 이렇게 ‘하라는 법’으로 바꾸셨다. 소극적인 법을 적극적으로 바꾸신 거다. 누구도 율법에 관해 쓴 소리를 할 수가 없었지만, 그분은 당신 뜻을 당당하고도 정확히 펼치시는 것이다. 이러하니 당대를 마음대로 처리하면서 풍미하는 겁 없는 율법 학자들은 의당 경악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또 무슨 말씀을 하실지, 불안과 초조, 공포에 매달려 전전긍긍했다. 사실 요즘 세간에서는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너무나 쉽게 그 법들을 무너뜨리고 가볍게 여기는 것 같기에 참으로 안타깝다. 악법이나 정의에 어긋나는 법은 자연 폐기해야만 한다. 법은 약하고 억울하고 가난한 이를 보호하고 살리는 역할을 하니까. 그러한데도 법이 최대한 그런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자의 편에 서 있다면, 그러한 법은 마땅히 폐기되어야만 할 게다. 그렇지 않으면 법은 독재자들과 강자들의 전유물인 흉기로 돌변하고, 약자들을 더 억누르는 흉악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니까. 사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소유와 능력에 달려 있지 않을 게다. 예수님이나 성모님마냥 이웃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고 가엾은 마음을 지닌다면야, 어떠한 처지에서도 이웃 사랑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 아침 눈 뜨면서부터 저녁 잠자리 들 때까지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베풀 기회는 정녕 많을 게다. 작은 일에 충실한 이런 이가, 반드시 큰일에도 꼭 그러하리라. 이렇게 무엇이든 겉모습에만 매달리면,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망각할 게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는 법조문만 구애받으며 표리부동하게 사는 바리사이 같은 삶을 버려야만 한다. 비록 느슨해 보이면서도 정직하게 사는 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삶이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이리라. 아무튼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하느님 사랑만이 최우선임을 일깨우고자 하신 것일 게다. 그분께서는 그 모든 율법이 결국 사랑의 계명, 모든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귀결되고, 또 그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됨을 가르치셨다. 사랑을 간직한 이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기에. 따라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사소한 작은 계명마저 지키려는 하루가 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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