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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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6-12 | 조회수17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4년 06월 12일 수요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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