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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마태오 5, 2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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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12 조회수152 추천수6 반대(0) 신고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저는 나이 들어가는 게 참 좋습니다. 아직도 욱하는 성깔은 여전하지만 나이 들수록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고 느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나서지 말고, 나대지 말며 보고도 못 본 척하라!’라고 다짐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런 성향을 제 아버지로부터 받지 않았을까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순전히 나쁜 놈만은 아니듯이 저의 아버지도 좋은분이셨고, 교회나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잘 참긴 하셨지만,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격으로 뭔가 수틀리면 화를 잘 내셨습니다. 참는 게 좋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으면 병이 된다.’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면서 자신 안에 억압하거나 투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마치 땅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참지 말고 받아 드리길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화가 나면 화를 표현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건강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화가 나면 그 화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들으려고 해야 하며,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물론 상대방에게 표현할 수 없다면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하고 가르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결정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으며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신뢰하면서 제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주님의 가르침은 우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참된 의로움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기들만 의롭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로움은 위선이고 독선이라고 주님께서는 비판하십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운 척하는 것이며 그렇게 의로운 척하는 것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께서는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체험과 직관을 통해서 참된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3, 6.7.9) 결국 오늘 우리가 살고 실천해야 할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율법에 따른 의로움은 신념이었지 믿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체험이고 이를 바탕으로 주님이신 예수를 믿고 따르며 주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의로운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구원되는 것이라 믿었기에 모든 과거의 것들을 쓰레기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되는 까닭’은 살해당한 사람은 물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반항이자 거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포함한 죄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힘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죄란 하느님=타인=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파괴이며 단절입니다. 죄란 단지 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 우리는 단지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나 규범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는 것입니다. 아울러 죄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인해서는’ 아니 되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고 있는 다른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죽이는 살인과 같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는 어떤 누구를 무시하거나 멸시할 권한은 없으며,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은 곧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도전이며 반항과 같기에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강하게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깨어지거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우리의 의지만으로 할 수 없으며, 화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회복을 이루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용서이시며 화해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도움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예물을 봉헌하기 이전에 주님께 대한 사랑의 헌신은 바로 형제와 화해하고 다시금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리고 잘못했다 하더라도 용서하며 살아갑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 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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