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
“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성도들은 춤추며 즐기게 하소서.”(시편132,9)
제가 강론을 쓰면서 참 많이 등장하는 말마디가 “참”이요 “참으로”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도 “참 의로운 삶,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 의로움”으로 정했습니다. 유난히도 우리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말마디같습니다. 참을, 진리를 추구하는 타고난 정신을 지닌 한국인들같습니다.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 봤습니다.
“순우리말로 진실, 사실이라는 뜻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참말이냐 거짓말이냐’ 등의 예문이 있다. 접두어로는 ‘진실하고 올바른’ 혹은 ‘품질이 썩 우수한’, ‘먹을 수 있는, 맛이 좋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기름, 참나무, 참꽃, 참교육, 참군인, 참사람등이 있다.”
새벽 일어나 우선 열어보는 것이 교황님의 홈페이지입니다. 어제 삼종기도후 강론 제목은 ‘성령이 성서를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였습니다. 성서대신 사람을 넣어, ‘성령이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능동적이 되게 한다’ 즉 참사람이 되게 한다로 읽어도 좋을 것입니다. 또 2025년 희년을 맞이한 바티칸 메디아 주제도 멋졌습니다.
“관광객에서 순례자로: 자신을 변형되도록 하라!”
(From Tourist to Pilgrim: Let yourself be transformed!)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말마디에는 영어나 한자를 병기하게 됩니다. 흔히 믿은 이들의 여정을 순례여정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관광객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순례자, 진리의 순례자,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갈 때 참삶의 실현이겠습니다. 마침 다산의 말씀도 참삶에 대한 지침처럼 보입니다.
“동물은 오늘을 살기에 일희일비하고, 인간은 오늘을 쌓기에 일취월장한다.”
“안목이 짧은 사람은 오늘 뜻대로 안되면 울고, 내일 뜻에 맞으면 생글거린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참을 추구하는 이가 참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은 우리의 성소도 관광객이 아닌 참된 순례자의 진실한 삶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 말씀에서 착안된 참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 의로움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제자들의 충실성을 뜻합니다. 그러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충실성, 더욱 새롭게 되고 절박하게 된 충실성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곳곳에서 이런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마태5,6ㄱ)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5,10ㄱ)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3,15ㄴ)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6,1ㄱ)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6,33ㄱ)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마태21,32ㄱ)
정적靜的인 의로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양되고 업그레이드 되는 동적動的인 의로움으로,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처럼 진리의 근원인 하느님께 가까이 이를수록 이런 동적 의로움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6개의 대당명제를 제시하시며, 그 첫째가 오늘의 “성내지 말라”입니다. 200주년 성서와는 달리 새번역 성서는 “화해하여라”입니다. 화해하니 요즘 한창인 개망초 들꽃들이 연상됩니다. 화해라는 멋진 꽃말에 개망초꽃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저는 “성내지 말라”가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성내지, 화내지 말아야 합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이들이 자주 화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지도자를 보면 자주 격노했다는 보도를 보는데 지도자로서는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내는 것 반대로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해서는 안된다”라는 계명을 한층 깊이있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이어 예수님은 형제에게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말하는 자에게 격렬한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형제들에 대한 이런 이성을 잃은, 형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분노나 막말은 그대로 간접적 살인에 버금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노나 비난은 살인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여차하면 살인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쇄신, 마음의 뿌리로부터의 변화를, 정화를 요구하는 의로움입니다.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들과는 화해후 예물을 바치라는 요구, 고소한 자와는 얼른 타협하라는 권고 역시 삶의 지혜이자 참된 의로움의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두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이요,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혼자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살핀다는 신독(愼獨)의 수행과 습관도 참으로 필요함을 느낍니다.
바로 이런 참된 의로움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듯이 가뭄해소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의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의 기도가 하느님을 감동케 하며, 엘리야의 이런 마음은 다음 동작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엘리야는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릅 사이에 묻었고, 무려 시종에게 일곱 차례까지 묻습니다.
“올라가서 바다쪽을 살펴보아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시종의 대답입니다.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삶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킨 엘리야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주님의 손이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뛰아가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의 한생애가 참 극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얼마나 치열한 진리 추구에 몸바친 의로운 삶인지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포르투칼 리스본의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5세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참사회원으로 입회하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복음적 생활 방식과 순교에 크게 매료되고 감화받은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에 입회했고,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받습니다.
모로코로 파견된 안토니아는 심한 병으로 회항하여 귀국길에 오르던중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 섬에 도착했고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어 그는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났고 그의 인정을 받아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게 됩니다. 당대 설교가로서 성 안토니오를 능가할 자는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성인을 ‘성경의 보물창고’, ‘신약의 방주’라고 불렀습니다.
성인은 이례적으로 35세로 선종한 후 다음 해 1232년 5월30일 스폴레토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2세는 거의 700년후 1946년 성인을 교회학자로 선언합니다. 안토니오는 젊은 프란치스코회 수사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특히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이미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았던,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다가 승천한 엘리야요, 하느님의 불꽃같은 치열한, 의로운 삶을 살다가 35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회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탁월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