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하나를 잃은 게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5, 29~30)
지난 부활 시기에 줄곧 들어온 복음 메시지가 있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와 내 아버지께서 너희 안에 있을 것이며 너희가 진리이신 내 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듣고 실행할 때 나와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집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줄곧 들어왔기에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모든 존재는 언제나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제게는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랑이 하느님의 본성이시라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오직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네 오른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리고,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5,29.30)라는 말씀은 너무 혹독하고 언어의 폭력처럼 느껴집니다. 사고로 한쪽 눈을 잃어버리거나 노동하다 손목을 잘린 분들에게는.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이며,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다고 해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 변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떠났다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떠난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제 믿음은 비록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자유라는 미명으로 거부할 수 있지만,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인간의 선택이 설사 잘못된 것임을 아시면서도 잘못된 자유의 선택을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하느님 사랑의 약함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픔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것을 허용하신다, 는 게 요즘 저의 새로운 묵상 주제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심지어 죄까지도 허용하시며 다만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그 단적인 복음이 바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15,11~32)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물론 그 선택을 한 본인에게 엄청난 결과 곧 고통으로 끝나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징벌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고통을 통해서 징벌하는 존재는 바로 자신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데 있고 그게 인간의 나약함이며 불완전함이라고 봅니다. 이런 연유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징벌하고 응징하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설사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징벌로 손과 눈을 빼어 버리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가르쳐야 한다면 저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렵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이 비록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알지 못했기에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한껏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반하고 배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의 사랑에 기초해서 교회를 세우신 용서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다만 저는 경험했기에 말씀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징벌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벌을 내리고 그 벌이란 바로 우리의 고통이며 아픔이라고 결단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징벌을, 응징을, 보복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고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징벌을 내릴 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오른쪽 눈이나, 오른손을 잘라 던져 버리는 것을 원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눈과 손으로 좋은 일을 하도록 격려하시리라 봅니다. 다만 스스로가 뒤늦게나마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사랑의 자유를 선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오늘 복음을 잘못 이해하지 않길 바라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를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안 아리아스는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에서, 『아니, 나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나약하다는 죄 때문에 갑자기 인간을 덮쳐오는 하느님을 물질을 비난하시는 하느님을 고통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인간의 기쁨을 방해하고자 빨간 신호등을 보이시는 하느님을 스스로 두려운 존재로 만드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친숙하게 다가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인간을 작은 손가락으로도 충분히 비틀거리게 만들 수 있는 거인 하느님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복권 하느님을 오직 손에 쥐어진 법조문에 의해서만 판결문을 내리시는 재판관 하느님을 인간의 서툰 실수를 보시고 미소를 지으실 수 없는 하느님을 비난만을 ‘일삼으시는’ 하느님을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시는’ 하느님을.... 인간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전혀 느끼시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으신 하느님을 세상 일에 등을 돌리고 이웃에게 무관심하도록 가르치시는 하느님을 배신한 사람을 절대로 만나려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실 수 없는 하느님을 인간을 위해 결코 눈물을 흘리신 적이 없는 하느님을 빛이 아니신 하느님을 사랑보다 순결을 더 좋아하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곳에 계시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보다 더 위대하지도 않으시고 신비롭지도 않으신 하느님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명목아래 우리 인간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하는 태양의 관용을 가지고 있지 않으신 하느님을 사랑이 아니시며 또한 그분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변화시키지 못하시는 하느님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하느님을 넓은 의미로 보아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내가 희망할 수 없는 하느님을 아니, 나는 그런 하느님을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토로하면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바람을 노래합니다. 아리아스의 역설적 기도는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바로 죄인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필요로 하는 죄인이기에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고백에서 하느님께 투정한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 찾사오니 제게서 당신 얼굴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시옵소서.”(시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