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단순함에서만 단답형이 / 연중 제10주간 토요일(마태 5,33-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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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6-15 | 조회수17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단순함에서만 단답형이 / 연중 제10주간 토요일(마태 5,33-37) 아마도 앞날이 불확실하면, 헛소문이 많고 말이 난무하며 온통 세상만사가 불안하리라. 그리하여 각종 유언비어로 사회는 방향 감각을 잃어갈 게다. 어쩜 정직하게 말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삶에서 말은 책임지는 것을 뜻하기에, 그렇게 사는 게 어쩜 불가능할 수도. ‘예.’, ‘아니요.’가 간단한 것 같지만, 의당 정직이 바탕에 깔려야하기에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으리라. 사실 우리가 무심중 지껄이는 잡담에도, 말은 생각과 느낌이기에 무게가 있다. 농담에는 농담의 무게가, 상담에도, 그리고 맹세에도 각각의 무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침묵에도 그에 따른 무게가 있을 게다. 사탕 하나 얻으려는 맹세에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계약을 문서 없이 새끼손가락만 걸고 하는 허술한 약속도 있긴 하다. 또 살다보면 분명히 답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애매한 답만 자주 하는 게 삶일 수도. 체면 때문에, 마음이 약해 이미 거짓말했기 때문이기도.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거짓 맹세는 안 된다.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하고 이르신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하느님 옥좌이기에. 땅에다가도. 그분 발판이기에. 예루살렘을 두고도. 위대하신 임금님 도성이기에. 네 머리를 두고도.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다. 너희는 ‘예.’와 ‘아니요.’만 말하라. 그 이상은 악에서 온다.”’ 맹세는 자신의 진실함을 알리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잘 안다면, 이 행위가 하느님을 정녕 욕되게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정말 단순하게 살자. 단순한 삶이 되어야 예수님 가르침 실천할 수 있다. 그분 역시 단순하게 사셨다. 사는 게 복잡하다 생각할 수 있으나, 실상은 늘 쉽고도 간단하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큰 감정으로 싸우지 않는다. 꼭 작은 감정 땜에 싸운다. 하찮은 감정이 싸움을 유발한다. 기분에 무심코 한 말이 상대방 아프게 했다. 사랑 표현에 무슨 헛된 맹세까지? 따뜻한 미소, 다정한 눈길 자체만으로도 확실한 게 아닐지? 결국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나약함을 깨달아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할 줄 알라는 뜻일 게다.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 대한 의탁이다. 그래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에는 ‘예.’하고,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요.’라고 확실히 대답하는 결단이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속한 이는 진실한 이다. 진리를 따르는 이는 자유로워지고 빛의 삶을 산다. 그 이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 말할 게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건 겸손이지만,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가식을 담기에 그릇된 맹세만 하리라. 맹세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일 수도. 복잡한 현실에서 단순함을 지니지 못하면 ‘예, 아니요’를 분명히 할 수 없을 게다. 겸손한 이는 진실에 대해 변명도 방어도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마저도 그리 쉽지만은 아니리라. 무엇에 ‘예.’를 하고, 무엇에 ‘아니요.’를 해야 할지가 실은 어렵고, 또 ‘예.’라고 답한 걸 실제로 실천하는지가 두렵다. 그러기에 그분 가르침에 의지하며, 늘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도록 청하자. 사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그분 이름조차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예.’할 것만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는 단답형이었다. 단순하게 살라는 그분 뜻을 늘 새기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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