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2024년 6월 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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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15 | 조회수16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 열왕기 상권의 말씀 19,19-21
그 무렵 엘리야는 산에서 내려와 19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흔히 우리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거나, 그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서 ‘맹세’라는 것을 합니다. 예를 들면, 계약 체결 때(신명 4,31;7,8), 약속 이행의 보장을 말씀하실 때(창세 22,16;26,3), 심판 예고 때(민수 14,21;아모 4,2;6,8),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실 때(에제 20,3;33,11)에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대개는 “나는 살아있는 자로다”라는 표현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유일한 보장은 하느님 자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명 6,13;10,20). 그리고 <레위기>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위 19,12). 그리고 법정의 심문에서나 예언자들의 예언에서 그 말의 진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하느님을 보증자로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거짓 맹세인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심지어 피조물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우상숭배의 결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주인이 아니기에, 하느님이나 하느님 것을 두고 맹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자일 뿐, 스스로가 부르심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일 뿐, 하느님의 뜻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응답하여 따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정직함’(솔직함, 질실)이 요청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성실한 실행에 그 진실성의 여부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응답하고, 응답한 바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는 이에게는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일입니다.”(힐라리우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의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창세 12,5) ~ 이리하여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 4,11-12)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음으로 ~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로마 5,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마태 5,37) 주님! 오늘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주인 행세하기를 멈추고, 당신 뜻에 응답하는 자 되게 하소서! 응답이 행동으로 진실되게 하소서! 제 말과 행동이 참되게 하시고, “예” 할 것을 “아니요”라고 하지 않고, “아니요”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게 하소서. 제 자신이 진리인 양 내세우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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