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 주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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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17 | 조회수15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시는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일인데, 사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편 가르기,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일,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 등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어떤 부상자를 고쳐 주신 일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당신의 계명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루카 22,49-51).”
칼을 뽑아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잘라버린 사람은
베드로 사도이고(요한 18,10), ‘대사제의 종’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온 군인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사용한 것인데, 상대방의 귀를 잘라버린 것은
아마도 칼이 빗나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칼을 사용하는 것을
막으셨고, 그 다친 군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일은, 원수를 사랑하신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전혀 저항하지 않고 체포당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이라는 말은, 천사 군대는
로마제국 전체 군대보다 수가 더 많고, 더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속 사람들의 방식으로
일하셨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힘이 없어서
참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약자들에게 주신 계명이
아니라, 어느 정도라도 힘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힘없는 약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의와 선이 짓밟히고, 인권이 탄압 당하고,
약자들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럴 때에도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만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하는가?
그럴 때에는 공동체가(교회가) 나서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고, 정의와 선과 인권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어야 합니다.
4) 자기 자신을,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위치에만
놓고서, 그 계명은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생각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 자신’이 누군가의 원수일 수도 있고,
그 누군가는 원수 같은 나를 사랑하는 그 어려운 일을
실천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의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함부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고, 죄의 내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들(죄인들)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은 ‘바로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죄가 없으니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다.” 라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이웃을 향해서는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 라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자비와 사랑을 주신다는 말씀에서,
‘악인, 불의한 이’가 곧 ‘나’ 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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