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사랑의 끝자락엔 언제나 용서가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마태 5,43-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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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6-18 | 조회수18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사랑의 끝자락엔 언제나 용서가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마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고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이에게도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그분께서는 악인도 선인에게도 당신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도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리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만 사랑하겠느냐?” 열심히 일했는데도 윗분이 알아주지 않거나 최선을 다했는데도 시부모님 반응이 시큰둥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인지상정으로 마음을 닫고플게 뻔하다. 그러나 마음을 여는 행위가 이해의 첫 단계이니 결코 닫아서는 안 된다. 이해를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말자. 이렇듯 이해는 작은 행위서 비롯된다. 마음을 열고 미소를 띠고서 다가가자. 사실 미움의 출발도 이 ‘하찮은 것’에서가 대부분이다. 상대를 잘 몰랐기에 생겨났단다. ‘알았다’ 하여도, 잘못 알았을 수도 있기에. 그러니 ‘새 출발’을 해야만 한다. 자, 지난날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게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사랑하고 또 기도하라.’라고 하신다. 서운하고 섭섭해도 마음만은 닫지 말자. ‘그런 행동’이 쌓여 미움이 되기에. 그러므로 이해의 출발이 용서요, 이는 닫힌 마음을 여는 행위이다. ‘비워서 여는 순간’ 은총의 기운이 들어간다. 마음을 열면 이 잠재된 용서가 작동되게 될게다. 예수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사랑이요, 그를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낸 게 바로 원수사랑이다. 부부간에 흔한 말인 ‘이 원수’이다. 원수는 원한이 맺힌 이로 언젠가 외나무다리서 만나리라. 하지만 그런 이가 그다지 많지 않다. 한쪽은 원수라 여기도, 상대는 아니라 생각도 하기에. 쌍방 모두 원수로 여기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단다. 말만 원수였지 실은 미운 이였을 뿐. 미움을 털면 또 이웃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사실 자신이 받은 큰 상처와 피해가 여전히 고통 속에 지울 수 없게 남아있는데,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원수를 사랑하려면, 그에 대한 큰 미움이 없어야만 할 게다. 미움은 한순간 형성되는 건 아니다. 어떤 미움도 그렇게 되기에는 원인과 시간이 있었다. 가는 세월에서도 그 미움이 크게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니 용서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만큼이 아니면 그 반만이라도 있어야만 할 게다. 그런데 우리는 한순간에 용서하려 덤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단다. 이는 용서에 대한 무지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를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이를 사랑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랴! 그건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이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게다. 그렇지만 원수사랑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핵심이면서, 가장 성숙한 열매이라나. 내가 비록 가까운 이도 용서하지 못해 힘들어할지언정, 이 사랑의 계명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면서,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닮아 갈 수 있어야만 하겠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사랑의 끝자락에 언제나 용서가 와 닿는다는 걸 명심하라. 그러니 무조건 지금의 미움을 우선 사랑하고 보자. 용서의 때는 반드시 온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그 무언가도 한 몫을 톡톡히 할 거니까. 원수 같은 그자들이 둘러싸도 증오와 보복이 아닌 용서의 길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그 길을 몸소 보이시려고 오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분 제자답게 이 길만이, 참 행복의 길임을 믿으면서 당당히 걸어가야만 하리라. 그분께서 가셨듯이 그렇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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