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신부님_떠남의 여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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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19 | 조회수16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하느님 중심의 자유로운 삶”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위 시편과 더불어 하심공경(下心恭敬)하는 마음으로 사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기도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땅에 뿌리내린 신비가 장일순 선생님입니다.
“밤이면 달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낮이면 해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오늘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 하권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는 장면입니다. 흡사 신명기에서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연상케 합니다. 이름 뜻도 흡사하니 엘리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God saves)”이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The Lord saves)”입니다. 말그대로 엘리사와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후계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요셉수도원에서 저와 현재의 빠코미오 원장수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1992-2014년까지 원장직 책임을 해오다가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빠코미오 수사가 원장으로 뽑혀 자연스럽게 뒤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빠코미오 수사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요셉수도원에는 큰 복입니다. 10년전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밤새워 썼던 강론이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이었습니다. 미사시 한 강론이 아니라 그냥 기록상 남겨두려 쓴 강론 서두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제 사랑하고 신뢰하는 제 후배이자 도반인 최종근 빠코미오 신부가 원장좌 자치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주신 느낌입니다. 경사중의 경사요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분들을 모시고 대망하던 자치수도원 승격 감사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아랫집 수녀원의 모든 수녀님들이 두 개의 꽃다발을 들고 신임원장과 퇴임하는 저에게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축하합니다.’라는 신임 원장과 ‘감사합니다.’라는 제 꽃다발에 붙은 내용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임원장과 퇴임원장의 아름다운 조화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순간 떠남의 여정은 감사의 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도 저와 흡사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오다 마지막 승천의 떠남을 앞두었을 때, 엘리야에게는 바로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에 대한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떠남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동안 그 힘들었던 날들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면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아오다가 오늘 맞이하는 마지막 승천의 떠남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평소 삶을 그대로 요약하는 참 멋진 승천의 떠남입니다! 그동안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은 참 좋은 선물인 후계자 엘리사를 마련해주셨고, 이렇게 홀가분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같은 승천의 떠남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둘사이가 얼마나 돈독한 신뢰의 관계인지 오늘 전 독서는 물론 승천의 장면을 목격하고 부르짖는 엘리사의 외침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그는 이어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마침내 하느님의 응답을 받아냄으로 명실공히 엘리야의 자랑스러운 후계자임을 확인시킵니다.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엘리사가 말하며,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면서 엘리사가 강을 건너니 이제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서 이제부터 엘리사가 새역사를 시작합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일은, 특히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같은 죽음이겠는지요! 말그대로 엘리야의 승천처럼 영적승리의 기쁨의 축제같은 죽음일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축제같은 떠남의 여정을,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하느님 중심의 수행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자유로운 삶이요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떠나는 축제같은 멋잔 삶이겠습니다. 바로 모든 수행을 오늘 복음의 참된 기도, 참된 자선, 참된 단식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과시욕의 허영과 교만의 위선적 삶에서 벗어난 철저히 숨겨진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이웃에 자기에게 활짝 열린 사랑의 삶이요, 참으로 내적자유와 평화의 삶이요, 그대로 진리체현의 삶입니다. 이런 숨겨진 삶에서 샘솟는 맑은 기쁨, 참된 행복입니다. 다음 한마디 주님의 약속이 큰 위안이요 힘이 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다산의 다음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한 인생을 뜻할 것입니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성실함이 비범한 인생의 조건이다.”
특히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기념하는 성 로무알도 아빠스가 이런 인물입니다. 평범의 비범을 살았던 사랑과 진실, 겸손과 지혜의 은수자 성 로무알도입니다. 951년경 출생한 로무알도는 972년경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여 생활하다가 아빠스의 허락하에 마리노라는 수도승과 함께 고독한 삶중에 스승과 제자라는 동방의 모델에 따라 살고자 수도원밖 라벤나 근교에서 공동체를 시작합니다.
당시 10-11세기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부유와 세속화로 타락한 획일적 공동생활에 환멸을 느낀 많은 수도자들이 은수생활쪽으로 향하던 시기였고 이의 대표적 수도회가 까말돌리회와 카르투시오회입니다. 언제나 수도회 개혁과 쇄신은 부유에서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고독으로의 전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까말돌리 수도원은 약 1023년경 성 로무알도가 설립한 마지막 공동체입니다. 로무알도의 까말돌리 수도회 영성의 특징은 은수적 관상과 사도적 활동이 절묘하게 조화된 관상적이며 수도승적이고 베네딕도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답게 사는 것은 참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떠남의 여정의 궁극의 목적지는 하느님이기에, 하느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기에,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충실할 때 저절로 자발적 홀가분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도 가능하겠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사랑의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시편31;24ㄱ,25).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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