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우리 청 들어주실 그분께 기도를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마태 6,7-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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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6-19 | 조회수164 | 추천수1 | 반대(1)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우리 청 들어주실 그분께 기도를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마태 6,7-15) 기도는 하느님과 마음을 연채 나누는 솔직한 대화이다. 꼭 무엇을 해 주십사는 요청보다는 삶에서의 감사와 청원을 드리는 것이리라. 따라서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사랑하는 그분께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는 것일 게다. 물론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마음을 온전히 아신다는 그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세속 대화에서의 중요한 신뢰를 그분께서야 어찌 모를 수 있으랴. 무엇에 익숙해져 능숙해진 것에서, 가끔 거기에서 내면의 진지함에 오해가 느껴질 수도. 우리 가톨릭 신자는 전례 시 보편적인 기도에 익숙해져 함께 소리 내어 기도하는 데에는 거리낌 없지만, 그 기도의 의미를 정녕 되새기고 삶으로 체험하려는 진지함을 잃곤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 아닐까 여긴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아시는 당신 뜻대로 살게끔 자신에게 어떤 의미의 일관된 확신을 청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꼭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언제 어디서 바쳐도 좋은 이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 땅은 과연 어디일까? 내가 머무는 지금 여기서의 ‘나의 현실’일 게다. 함께 할 가족이 있고, 사랑과 용서로 내 자신이 가꾸어 가야 할 미래가 펼쳐질 곳이다. 하지만 이 기도의 속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간청하는 것만은 결단코 아닐 게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전지전능하시기에, 우리가 굳이 기도를 올리지 않더라도 당신 뜻을 충분히 관철하실 수 있기 때문일 게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 뜻에 따라서, 늘 그분 가까이에 머물면서 꾸준하게 ‘사랑 실천의 삶’을 누리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실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우리가 다른 형제를 용서해야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자. 예수님은 평생 우리라는 남을 위해 사셨다. 물론 그분은 그렇게 사셨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관심사를 늘 먼저 헤아리신 분이셨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위주의 사고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온통 세상 것에 너무 얽매여 거기에만 늘 집착한다. 그래서 우리 삶 깊숙한 곳에 함께 계시는 그분을 종종 잊는다. 그분 없이 온전할 수 없는 우리인데도 말이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다스림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속적 문제를 더 염려하고 그걸 더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미 그것들을 다 아신다. 그래서 우리가 정작 청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에서 자녀 되는 조건들이다. 이는 구원에 필요한 회개와 용서, 그리고 구원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용기다. 이처럼 기도는 나의 욕망을 버리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 청 꼭 들으시려는 하느님 그분께, ‘아멘, 아멘!’하면서 정성껏 기도드리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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