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_마귀 학교 우등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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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21 | 조회수19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동영상 촬영하는 형제님이 개인 사정이 있어서 실시간 촬영을 못 하고, 녹음을 한 것을 올리기 때문에 유튜브 통해서 들으시는 분들은 아마 녹음 파일로만 들으시게 될 겁니다. 한 달 전에 제가 한 강론 때문에 어느 신자들이 싸움이 일어났대요. 믿기지도 않고, 황당하기도 하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한 달 전에 그랬어요. 내가 앞으로 이곳에서 신자들을 만나고 또 외부로 피정 나가는 것이, 나이를 생각할 때 10년에서 15년 후면 80 중반이 되는데, 그때 이곳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어느 신자는 교구에 봉헌하지 왜 고민하냐고 하니, 내막을 아는 신자가 설명하니까 그것 때문에 싸움이 났다는 거죠.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래서 내가 오늘 확실히 설명해야겠어요. 이 땅에 대한 권한은 나한텐 1%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곳은 내 동생이 전부 다 한 거예요. 물론, 제대, 제대 뒤에 십자가, 성모상 등은 교우들이 봉헌한 거예요. 그 외에 이 땅을 산 것, 집을 지으면서 들었던 모든 것은 우리 동생과 또 후원자 한 명에 의해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 자체가 내 이름이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나중에 사제단 숙소로 늙어서 가더라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땅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남의 땅 가지고 싸우지 마요. 정말 황당하게 이를 데가 없어요. 왜 싸움거리가 됐는지. 싸움거리가 돼요? 아니잖아요. 모르죠. 동생이 ‘형님 그냥 교구에 봉헌합시다’ 하면 봉헌 할 수도 있고, 돈이 필요해서 이것 팔아서 써야겠다고 하면 그럼 파는 거예요. 난 아무 권한이 없어요. 제발 이 땅 가지고 싸우지 좀 마요. 내 마음도 동생이 나중에 봉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그 정도의 고민입니다. 이해되세요? 아무튼 동생이 그건 알아서 할 것이고, 나는 1%의 여기에 대한 권한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오늘 제1독서에서 선악과를 먹은 뒤에 숨었죠? 왜 숨었어요? 홀라당 벗은 게 창피해서. 선악과를 먹은 뒤에 하느님께서 부르셨죠. 부르시면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인가요? 아니죠.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셨죠.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상태, 어떤 상황인지를 묻는 거죠. ‘너 도대체 어떤 상태이길래 날 보고 피하느냐?’ 이거죠. ‘어저께까지만 하더라도 발가벗고 나랑 같이 다녀도 너 부끄러워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왜 날 보고 피하느냐?’
‘상태’를 다른 말로 ‘관계성’이라고 일컬어요. 그래서 ‘신앙은 관계성이다’라는 얘기를 제가 자주 합니다. 먼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그다음에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 마지막으로는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그런데 이 3개의 관계 중에서 어느 것 하나가 깨지면 두 가지 관계도 깨질 확률이 커져요. 아주 밀접히 연결되어 있죠.
예를 들어서 내가 내 자신이 정말 싫어, 거울도 보기 싫어. 내 안에 나를 싫어하는 미움이 가득 차 있을 때 이웃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겠어요? 친구가 전화해도 전화 안 받아요.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당에 가겠어요? 가서 앉아 있더라도 그냥 빈 껍데기만 앉아 있는 거예요. 또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깨졌어. 그러면 당연히 나와 나와의 관계도 불편해져요.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실까?’ 하는 원망도 나도 모르게 들어요. 또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깨지면 자동으로 나와 나 자신, 나와 이웃 간의 관계도 같이 깨지게 돼 있는 거죠.
이러한 관계성이 깨지면 나타내는 반응은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숨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깨졌죠. 규칙을 어겼잖아요. 그것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죠? 그러고 나니까 첫 번째 행동이 뭐예요? 숨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행동은 뭐냐? 변명하는 거예요. 책임 전가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된 게 내 탓이 아니다. 그놈 탓이다.
오늘 제1독서에는 변명의 극치가 나오죠. 그리고 이러한 인류 첫 번째 조상들의 변명, 책임 전가가 어쩌면 그렇게도 지금에 이 시대까지 그대로 나에게서 드러나는지, 그대로 유전되듯이 내려오는지를 우리는 절감해요. 11절에 ‘내가 너에게 따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느냐?’고 아담에게 묻죠. 하느님이 그랬더니 아담이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 위해 제가 먹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줬대요. 아주 아담은 나쁜 놈이야, 세상에! 하느님을 원망해요. 풀이하면 이거죠. ‘왜 저따위 여자를 나한테 주어서 내가 저것을 따먹게 하신 겁니까? 저 여자를 나에게 준 당신 하느님의 책임이 큽니다.’ 하느님에게 책임 전가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당신이 저와 함께 살라고 물건 주듯 줬던 이 여자가 나한테 먹으라고 해서 내가 따먹었으니, 내 책임이 아니죠. 당신이 좀 제대로 된 똘똘한 여자를 나한테 주실 거지, 왜 저따위 여자를 주어 내가 죄 속에 빠지게 합니까? 당신 책임이 큰 것 아니에요?’ 이 뜻이에요. 기가 막힐 노릇이죠. 참, 못 됐어요. 아담이 죄는 자기가 지어놓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첫 조상이며 첫 남자인 아담의 책임 전가와 궁색한 변명은 유전되듯 지금도 나에게서 우리에게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자도 마찬가지였어요. 하와에게도 왜 이런 짓을 했느냐고 하느님이 물으니 또 뭐라 그래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 누구에게 책임 전가합니까? 뱀. 정말 끝도 없이 ‘다 네 탓이야, 내 탓은 없어.’ 저놈이 나를 죄짓게 만들었기에 내가 죄지은 것이고,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당신이 만들어놨기에 내가 죄에 떨어진 것이니 난 책임 없어. 왜 자유 의지를 왜 나한테 준 겁니까?
내가 가끔 그러죠. 네 탓이라 손가락질할 때 이것이 무슨 뜻이라고 그랬어요? 손가락 하나는 그놈 탓이고 하나는 하느님 탓이야. 하지만 그놈 탓 하느님 탓 두 개 합쳐도 3개는 누구를 향하고 있어? 그렇죠. 하느님 탓, 그 인간 탓 합쳐도 내 탓이 더 크다는 얘기예요.
오늘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미스터 뱀은 할 말이 없었을까? 여러분이 뱀이라 한다면 억울할까요, 억울하지 않을까요? 억울할 것 같아요. 왜? 뱀도 분명히 이런 말로 하느님한테 얘기했을 거예요. ‘나 억울합니다. 나 책임 없어요.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말이 틀린 말입니까? 하느님 대답해 보세요. 나는 저것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말했을 뿐이지, 내가 까서 입에다 집어넣은 적 없어요. 지들이 잡수셨죠.’
성서적으로 뱀은 마귀를 상징하죠. 마귀는 오늘 제1독서에 나온 뱀처럼 죄에 떨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뿐, 우리들의 의지를 못 건드려요. 죄에 떨어지는 것은 우리지, 뱀 때문에 떨어지는 게 아니죠.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분위기만을 조성했을 뿐, 따서 입에 넣어주지는 않았다는 말이죠. 맞는 얘기죠. 뱀도 할 말이 많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창녀촌이 쫙 있는 데를 지나가야만 돼. 창녀들이 들어오라고 그냥 꼬셔. 그럴 때 거기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 달린 거예요? 지나가는 그 남자한테 달린 거예요. 들어가서 창녀랑 자고 난 다음에 ‘아우 저 창녀 때문에 죄지었어.’ 창녀는 그 사람 직업인데 그 사람 탓을 왜 해? 자기 의지로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거죠.
이렇게 관계성이 깨지면 책임 전가를 하고 변명하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우리도 살면서 그렇게 산 적 있죠. 어떻게든 남 탓해서 나는 빠져나오고 싶고, 저 사람 죄를 더 크게 만들어 나의 죄는 작게 하고 싶고, 자기의 의지로 죄를 지어놓고도 하느님 탓하고 남편 탓하고 아내 탓하고 이웃 탓하고 뱀 탓하고 조상까지도 탓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래요, 안 그래요? 겸손한 사람은 남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마귀의 유혹이 극에 달하는 환난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정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마귀의 밥이 됩니다. 마귀 밥의 대상은 신부건 주교건 상관없어요. 사제복을 입고 다닌다고 마귀가 안 건드리냐? 천만에! 신자 수백 명 거꾸러뜨리는 것보다 신부 하나 무너뜨리는 것이 훨씬 더 마귀한테는 이득이죠.
마귀 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교장 마귀가 세상에 나갈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구술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이 시험에 통과해야만 세상에 나가서 인간들을 손아귀에 집어넣을 수 있어요. 교장 마귀가 뭐라고 질문했느냐? ‘이 세상에 나가서 인간을 어떻게 죄에 떨어뜨릴지 대답해 보거라.’ 첫 번째 마귀가 ‘인간의 마음 안에 지옥은 없어. 그러니 마음대로 죄짓고 살라고 할 겁니다.’ 그랬더니 교장 마귀가 ‘그것 가지고는 안 돼. 인간들은 살면서 지옥 같은 일들을 많이 겪고 살기 때문에 어렴풋이 지옥이 있다는 걸 알아. 지옥이 없다는 말 가지고는 안 통해.’ 첫 번째 마귀는 졸업 못 했어요. 두 번째 마귀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심판이 없다고 속삭이겠습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지 않으실 거니 마음대로 죄짓고 살라고 얘기하겠습니다.’ 그랬더니 교장 마귀가 ‘그것 가지고도 안 돼. 인간은 양심이 있기에 죄에 떨어지면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돼 있어.’ 그래서 이 두 번째 마귀도 졸업 못 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마귀, 공부를 제일 잘한 마귀예요. 그래서 교장 마귀가 기대했죠. 넌 나가서 뭐 가지고 인간을 망가뜨릴 거냐 했더니 역시 달라, 수석으로 졸업한 애라. ‘인간의 마음에 마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귀는 다 가짜고 전설이고 신화고 소설이니, 마귀가 있다는 것 믿지 말라고 속삭이겠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교장이 ‘됐다. 너는 졸업장 주마. 세상에 나가서 그 무기를 쓰거라.’
그래서 지금 마귀들은 그 무기를 가지고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요. 신학교에서도 마귀를 안 가르칩니다. 수녀원에서도 마귀에 대한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본당 신부님 강론에 마귀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주교님들의 강론과 사목 교서에서도 사탄을 싸워 이기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마귀 얘기하는 신부나 수녀는 이상한 취급을 당하는, 마귀가 원했던 세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어요. 예수님께서도 수도 없이 마귀와 싸우시고 쫓아내시고, 제자들에게도 마귀를 대적해서 양들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주셨던 것을 새카맣게 교회는 잊어버리고 있어요.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아시죠? 그분이 교황 때 바티칸도 하나의 나라이기 때문에 장관들이 있어요. 장관들이 전부 추기경들이에요. 사제들이 연중 피정하듯 추기경들과 교황님이 모여서 강사를 모셔다가 피정해요. 어느 해인가 이탈리아에서 구마 사제로 유명한 할아버지 신부님을 강사로 모셨죠. 그 신부님은 한평생을 구마사제로 사신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구마 사제세요. 허리를 구부리면서 올라온 설교대 앞에는 교황님이 가운데 계시고 분홍색 망토를 걸친 추기경들이 쫙 앉아 있었겠죠. 그 신부님은 어떤 말로 강의를 시작했느냐? ‘나는 한평생을 마귀와 싸운 사제입니다. 이 나이 먹을 때까지.’ 그러면서 추기경들의 손가락질하면서 ‘당신들은 직무 유기요’라고 그랬어. 내 나이 90 먹을 때까지 수 많은 주교, 추기경들의 강론을 들었지만, 사탄에 관한 이야기하는 강론은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엄청나게 혼났대요. 그래서 강론 후 추기경들이 그 신부님에게 고백 성사 보느라 피정이 며칠 더 연장됐었대요. 그런데 그 후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뭐가 확 달라진 게 있느냐? 달라진 건 없어요. 그 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교황 되자마자 전 세계 지역교회의 모든 교구에서는 구마 사제를 양성하라고 훈령을 발표했지만 구마 사제를 만드는 교구 없어요. 답답하죠.
사탄은 실제로 있고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죽하면 제가 감곡 성모 순례지에 있을 때는 1년에 몇 번씩 수천 명 신자 앞에서 구마 예식을 했었어요. ‘자 마귀가 없다고 믿는 인간들, 네 눈으로 한번 봐라. 얼마나 무서운가.’ 구마 의식할 때 보면 정말 무섭죠. 영화에서 보는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섭죠. 구마 사제는 마귀와 싸워서 그 양에게 붙은 마귀를 떼어낼 때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예요. 사제가 마귀한테 지면 그 마귀는 사제한테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사탄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예수님과 성령과 함께하면 절대로 우리들을 못 건드린다는 걸 믿으셔야 합니다. 한평생 마귀를 체험하고 살았던 은퇴 사제로서 교구마다 주교님들이 구마 사제를 양성하셔서, 마귀에 시달리는 양떼들을 지켜낼 수 있기를 저는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정신과 의사가 고쳐줘야 할 병이 있고. 구마 사제가 해결해야 할 영적인 병이 따로 있지요. 지금 신부님들은 신학교에서 마귀라고 하는 얘기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신부가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안 그래요. ‘신부님 우리 딸이 몇 달째 잠을 못 자고 이렇게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쳐요.’ ‘왜 나한테 데리고 오세요? 병원으로 가 데리고 가세요.’ 배워본 적도 없고 그런 걸 본 적도 없기에, 그런 상황 앞에 부닥치면 신부가 무서워 떨죠. 구마 사제는 마음먹는다고 사제들이 다 되는 것은 아니에요. 교육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주교님들이 로마 구마 사제 학교로 교구마다 사제들을 보내서, 각 교구에 한 명의 구마 사제만 있어도 양 떼들은 훨씬 더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해요. 아멘
오늘 복음은 사탄이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탄 얘기가 나왔죠. 예수님이 그때 사탄 얘기한 것이, 전설을 얘기한 것이 아니죠.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사탄 얘기하는 걸 금기시한다면 이게 바로 마귀가 원하는 거예요. 자기 존재를 감추고 교회를 거꾸러뜨리는 것.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이 내 뒤에 계시고 성령이 함께할 때는 마귀는 내 머리카락 하나 건드릴 수 없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뭔가 어둠이 여러분을 지배하려고 할 때 교회가 가르쳐준 구마기도 있죠. 구마 사제가 하는 그런 특별한 구마기도가 아니라요. 여러분들이 믿음을 가지고 구마기도를 하세요. 여러분 자식에게 어둠이 보인다면, 가족들에게 어둠이 보인다면 강하게 기도하세요. ‘나자렛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령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거라.’ 딱 세 줄이요. ‘나자렛 사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거기서 끝내면 안 돼.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거라’ 명령해야 해요. ‘사탄아, 물러가라’만 하면 나갔다가 온 동네 다 돌아다니다가 일곱 마귀를 끌고서 또 기어들어 와요. 이 기도는 평신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지만, 힘 있는 구미경이에요. 하실 수 있죠? 어려운 거 아니죠. 그 대신 그 구마기도를 상대편한테 쓸 때는 잘 쓰셔야죠. 맨날 술 먹고 들어오는 술마귀에 빠진 남편한테 남편이 아파트 문 열자마자 ‘사탄아, 물러가라’ 했다가는 쌍코피 터져요. 그러니까는 대놓고 하지 말고 속으로 하란 말이에요. 하지만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는 목청껏 하세요. 당사자가 앞에 있을 때는 대놓고 하면 상처받을 수 있잖아요.
우리 살면서 아담과 하와처럼 늘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죠. 정말로 그래도 ‘그래 내 탓이다.’ 하면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잖아요. ‘아유 저거 속이 얼마나 쓰릴까? 그런데도 저렇게 담대하게 받아들이네. 아이고 불쌍한 것.’ 하면서 주님이 안아주실 거예요.
주님께서 오늘 미사 때 필요한 축복과 위로의 말씀 주실 것을 믿으면서 우리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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