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욥기의 말씀 38,1.8-11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불볕더위가 밀려오는 듯하더니, 장마가 다그쳐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삶의 신비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네 삶 안에 있기 마련이 ‘고통과 시련의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줍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고 그것을 통하여 어디로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줍니다.
사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말하듯이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질병이나 고통이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비참한 상태로 몰아갈 때가 있고, 자연 재해, 물질적 상실, 가정이나 공동체의 분열, 온갖 종류의 근심걱정, 시련과 박해가 있습니다.
또한 의인이나 무죄한 이들이 불합당한 처사를 당해 신음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억울해지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앙을 흔드는 거센 풍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믿음이 시험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욥의 새 친구와 욥과 엘리후의 변론을 통해서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여전히 욥은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침묵하시는지?’ 비참에 떨어져 절규하는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답을 들려주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욥 38,8-11ㄱ)
이 대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시고 당신의 신비로운 계획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아가지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곳은 하느님께서 길을 내주신 곳까지입니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욥 38,11ㄴ)
이 말씀에서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하고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며 받아들임으로써 그 참된 해답을 얻게 됨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는 것’,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곧 기쁨이나 즐거움, 혹은 성공과 승리에서만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질병, 고통과 상처, 무능과 실패를 통해서도 신앙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바닥을 치는 데까지 나아가서야, 그 순간 오히려 그 한계와 나약함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겸손한 신앙’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이 ‘겸손한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과 시련이었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 고통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것은 ‘믿음’입니다.
바다 위에는 '거센 돌풍이 일었고',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함께 계시지만 침묵하고 계시고, 현존하고 계시지만, 잠들어 계십니다.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은 함께 계신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은 잠재우고, 제자들은 깨우십니다.
곧 풍랑을 향해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능하시고 진실에 쌓여 계시오니,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
(시 88,9-10)
동시에 제자들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는 반면, ‘믿음’을 깨웁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라고 투덜댈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입니다.
아니, 바로 그 때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이 어둠을 넘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시며, 제자들을 불신의 어둔 잠에서 깨우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우리에게 거센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의 요청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그분의 사랑의 요청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2코린 5,14).
“다그치다”(συνεχει)라는 말은 ‘빨리 행동하도록 몰아붙이다’, ‘강하게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행동하게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강력한 힘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코린 5,1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