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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신앙생활은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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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23 조회수105 추천수3 반대(0) 신고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35-41)”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까지’ 지배하시는 분”,

 

즉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제자들의 말은,

 

제자들이 그때까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제자가 되긴 했는데,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그랬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체험할 때마다 계속 놀라게 되고,

 

점점 더 예수님을 잘 알게 되고, 더 깊이 믿게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 뒤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직도 나를 모르고 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

 

마르코복음만 놓고 보면, 이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았고(마르 1,25-26),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마르 1,34).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병자들 가운데에는, 그 당시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병 환자’도 있었고(마르 1,41-42),

 

중풍 병자도 있었고(마르 2,11-12), 장애자도

 

있었습니다(마르 3,5).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복종하게 만드는 일은, 그들에게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기적,

 

또는 차원이 다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큰 두려움’에(‘큰 경외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처음부터 ‘거센 돌풍’과 ‘파도’가 생기지 않게 하실 수는

 

없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실 수 있었겠지만, 일상적인 자연 현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질문은, “처음부터 박해가(고난과 시련이) 일어나지 않게

 

하실 수는 없는가?” 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계속 그런 질문을

 

했거나, 그런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박해자들도, 그 자신들은 모르고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구원사업의 대상자들이고,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분이고, 정말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외적으로 직접 개입하시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5-7).”

 

이 말은, 누구나 무조건, 반드시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더욱 강하게 ‘단련’되고,

 

더욱 순수하게 ‘정화’된다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설명입니다.

 

고난과 시련 자체를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일들을 통해서 단련되고 정화되어서,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히 주님의 뜻입니다.

 

 

 

3)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눈앞에 닥친 고난과 시련이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없애

 

달라고(막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없애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보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가 더 좋은 기도입니다.

 

어떻든 인생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작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갈 때, 거센 돌풍과

 

파도를 만나서 정말로 힘들게 갈 수도 있고,

 

호수가 아주 잔잔해서 편안하게 갈 수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노 젓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호수가 아주 잔잔하고 경치도 좋아서 노 젓는 것을

 

멈추고 경치 구경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목적지를 앞에 두고 중간에 멈추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이고,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간에 중간에 멈추는 것은

 

처음부터 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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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2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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