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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 신부님_역사를 바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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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최원석_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6-23 조회수147 추천수2 반대(0) 신고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예언서 세 번째 시간으로 예언서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못했던 아가서, 아가서의 뜻이 무엇인지 짧은 묵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지난주일 미사 강론 들으셨습니까?

강론 제목이 ‘마귀 학교의 우등생’일 텐데, 마귀가 가장 잘 쓰는 무기는 자기 존재를 가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꼭 반드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것이 되게끔 반복해서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지난번 예언서 두 번째 시간의 핵심은 ‘구약 예언자들의 가장 큰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얘기를 드렸죠.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맞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실 제자들도 아무 힘도 못 쓰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을 한심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도 모른다고 그랬고, 십자가상 그 밑에 제자는 요한 하나뿐이었죠.

다 살길 찾아서 도망을 갔던 겁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옵니까?

‘남을 구원하였으면 자기도 구원해야 하는데 자기는 구원할 수가 없는가 보다.

네가 만일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렇게 모욕받고 침 뱉으면 받고, 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서 제사장, 율법 학자, 장로들, 또 많은 무리,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까지 조롱받았던 분이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통을 당하실 때 어느 하나 누구라도,

‘바로 저분이 구세주이고 구세주의 죽음을 우리가 보고 있다’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있었겠네요. 성모 마리아.

당신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렇죠.

다른 모든 사람은 어떻게 알고 있었겠습니까?

‘가련한 남자의 참혹한 죽음’이라고 밖에 사람들 눈에는 비치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사람의 눈이란 오류에 가득 차 있죠.

그렇지만 이 참혹한 예수님의 죽음이 세계 역사를 온통 바꿔놨습니다.

 

세계의 역사는 이때부터 새로이 시작됐죠.

예수님의 탄생부터 헤아려서 금년이 2024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에 다니든 누구든지 간에 전 세계 공용 책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합니다.

종교사는 물론이고. 문학사, 미술사, 음악사 그리고 과학사도 분명히 바뀌어 있을 겁니다.

또한 2024년 그 사이에 그리스도를 따라 걸어온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여러분도 그중에 하나고 저도 그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 사람들의 일생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송두리째 바뀌었죠.

이러니 세계의 역사가 바뀌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예수님의 예언으로 한번 가봅시다.

7장 15절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의 탄생 예언이 시작되죠. 그리고 ‘동정녀의 잉태’가 이때 나옵니다.

9장 5절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분명 영원히 평화의 왕이 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늘날까지 영웅이나 독재자, 권력자가 정말 무수히 많이 살다 갔죠.

네로,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등등 정말 많은 독재자가 살다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은 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얼마나 하찮고 연약하고 허무한 것일 수밖에 없을까?

 

성경에 보면 사무엘이라는 선지자,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시하는 선지자나 힘 있는 자에 의해서 재판을 받고 또 다스려졌죠.

그렇지만 사무엘 말년에 사람들은 왕의 제도를 만들자고 사무엘에게 강하게 요구합니다.

‘다른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

사무엘은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느님 말씀하셨죠.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라.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나를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민의 왕이 하느님인데 왕을 세워서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하게 하려는 것, 즉 백성들 눈이 멀어 있다는 얘기죠.

사무엘은 내키지 않았지만, 백성들에게 왕을 세워줍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워줬더니 그 왕은 이제 법을 만들어 징병합니다.

그리고 아주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죠.

사무엘은 계속 경고하지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느님보다 인간인 왕을 더 신뢰하고, 예전에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하느님께 해결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지만, 이제는 하느님께 매달리기보다는 왕에게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왕이 없이 선지자들에 의해서 나라가 다스려질 때보다도 왕을 만들고 난 다음부터 이스라엘은 잘못된 길로 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할 겁니다.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간인 왕을 숭상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겠죠.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오를 반복하는 역사가 계속됩니다.

그러면서 뭘 깨닫게 되느냐?

이사야나 또 그 외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구세주의 출현’을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왕을 만들어서 뭘 해보려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계속 식민지로 끌려다니고 고통 중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체험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왕이 아니라 참다운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기 시작한 겁니다.

하느님이 보내실 구세주에 의해서만 이스라엘은 구원될 것이라는 믿음을 다시 갖기 시작합니다.

 

2천 년 전에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탄생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렇지만 그 당시에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임을 일단 믿었던 사람도 십자가상의 예수를 보고서는 그를 버리게 됩니다.

이사야서 53장 3절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퇴박을 맞는 신세’가 됩니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아가 왔는데 보지를 못하는 거죠.

이사야 예언에 이미 다 나와 있는 예언들이었습니다.

어떤 성서학자가 이렇게 얘기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리스도는 진정 구세주임이 맞다. 자신이 십자가상에서 고통의 극에 달해 있을 때조차도

같이 매달린 십자가상의 강도 하나가 ‘천국 가실 때 나 좀 생각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받으시니,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별 의심 없이 또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다 생각하지만, 사실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린 좀 배가 아파도 남의 일을 도와주질 못합니다.

조금만 내가 불편해도 ‘내가 지금 힘든데’ ‘내 코가 석 자가 빠졌는데’ 하며 다른 사람의 사정 들어주질 못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최후까지 구세주로서의 길을 가셨다는 얘기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고통도 상상할 수 없는데, 그 앞에서 오늘 천국 갈 때 나 좀 데려가 달라고 하는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은 고통받는 인간이 아니라 구세주의 의연한 모습으로 우도에게 천국 선언을 하시죠.

아무튼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 중에서도 최후까지 구세주로서의 그 자세를 잃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요. 우리를 구해주시러 오셨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십자가상에 매달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상의 고통 중에서도 간구하셨죠.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일 때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시고 또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그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참 많죠.

11절 1장 이하를 잠깐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리라.

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구약 성서는 이처럼 예수님을 갈망하면서 46권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서는 오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시작이 되죠.

문자 그대로 복음이 기록되는 겁니다.

신구약을 합쳐서 성서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성서는 예수님이 오직 구세주임을, 그리스도이심을 제시하고 있지요.

구약을 읽고 비로소 신약의 그리스도의 성서는 마음을 흔드는 기쁨의 방문자임을 우리들은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 성서 강의를 시작할 때 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구약 성서란 옛날 성서다, 아니면 신약이 더 훨씬 더 중요하다, 등 구약 성서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있고,

또, 구약은 너무 어렵다, 또 성경이라고 하는 책인데 읽어보면 좀 살벌한 내용도 많다고 하면서

구약 성서를 아예 가까이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저는 교우들이 구약 성서 강의를 들으며 구약 성서를 어려운 성서가 아니라

그래도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입문서, 안내서로 이해하기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 드리겠다고 했죠.

가끔 교우들에게 제 강의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물어보면 신부님 강의 좋아한다고 얘기는 하겠지만, 그분들이 진정으로 진심으로 구약 성서를 다시 읽게 됐다든지

또 구약 성서에 대해서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진다고 하면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참 기쁩니다.

 

예언서까지는 이렇게 끝이고, 구약 전체를 들춰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아주 인상적이었던 몇 군데만 간단히 다음 시간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소개가 끝나고 나면 구약 강의는 끝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거듭 강조하지만, 구약과 신약은 별개가 아니라 구약의 핵심은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이고 신약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져 있고, 신약으로써 구약은 완성됩니다.

그리고 구약 46권의 테마를 세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거겠죠.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용서하신다고 할 수 있죠.

창조하면 한동안은 반짝거리고 옳게 살다가,

다시 또 죄에 떨어져서 범죄하고,

또 고통을 스스로 당하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면 하느님은 다시 또 재창조를 해줍니다.

구약 46권의 흐름은 ‘창조, 타락, 재창조’, ‘창조, 타락, 재창조’가 계속 반복되는 책입니다.

전체적인 스케마가 그렇게 나가죠.

이런 것도 여러분들 기억하시면서 넓게 펼쳐져 있는 대평원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구약을 보셔야지,

어느 한쪽만 계속 집중적으로 쳐다보면 그림이 완성되질 않습니다.

아무튼 예언서 이제 끝이 났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단장이라 할까요, 짧은 성경 묵상 몇 가지를 같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해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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