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화해와 일치는 오로지 용서로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마태 18,19ㄴ-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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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6-24 | 조회수12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화해와 일치는 오로지 용서로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마태 18,19ㄴ-22) 한 가족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일 게다. 같은 민족 간의 전쟁은 많은 가족들을 이처럼 비참하게 흩어 버렸다. 6·25전쟁이 끝난 지도 70년을 앞두고 있어, 이산의 그 큰 슬픔을 느끼는 세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긴 세월이 흘러 분단의 고통도, 이산의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심리가 부담이 된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이를 용서하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살다보면 미움은 자신과 남 모두를 몽땅 망가뜨리는 무서운 거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잊으려고 회피하거나 무관심해 보려고 하지만, 미움의 끝은 내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나의 상대인 그 남이 없어지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될지도 모른다. 더 힘든 건, 서로 상처 받은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의 기억이 그 아픔을 시도 때도 없이 꺼내 반감을 부르고, 더 큰 분노로 그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거다. 거듭 다져보지만, 같은 민족끼리 죽고살기로 상대를 향해 총을 겨누어 온 지도 어느새 60년이 훨쩍 넘었다. 세월이 흐르면 이 땅에 화해와 일치의 평화가 찾아오려니 그 기대가, 이제 다소간 그 시작의 낌새가 보이지만, 긴장과 갈등은 여전하다. 사실 지금껏 만나는 출구조차 못 찾아 이 구석 저 구석 쳐다보지만, 마음은 언제나 너희가 먼저라면서 뒷짐이었다. 이 와중에 죄 없는 북한의 형제들만 굶주림과 온갖 학대 속에서 고통을 겪는 것 같다. 남북은 여전히 끝도 없는 무기 경쟁을 해 왔다. 불행을 가져오는 군비 증강을 중단해야 전쟁은 끝내 사라질 게다.
“일곱 번보다 일흔일곱까지도 용서하라.” 화해를 위해서는 끝없는 용서가 필요하단다.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을 닫는다. 닫힌 마음으로는 함께 대화고 기도고 도무지 할 수가 없다. 그게 지금까지의 ‘남북의 안타까운 관계’였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랜 기간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평화통일은 요원한 느낌마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설사 그렇지만, 설령 그토록 간절한 통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형제를 용서할 수 없는 적으로는 여기지를 말자. 따라서 화해와 일치를 위해 먼저 해야 할 게 용서다. 사실 용서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그 마음 안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 있기에. 그러나 그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용서이다. 나 스스로를 위해서도 용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기쁨과 평화로 화해와 일치의 길로 가기에. 민족이 지닌 오랜 분단의 상처가 치유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자. 이것이 하느님 자비로 무한한 용서를 실천하는 신앙인의 유일한 길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비의 하느님 계명을 끝내 저버리는 거다. 그러니 이제는 정치적인 선입관 같은 따위는 아예 접자. 미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다가가자. 그래야만 그분도 함께하실 게다. 남과 북이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날이 화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갈라진 민족이 서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길 바라며 기도하자. 주님의 은총으로 남북이 지혜를 모아 분단의 설움이 사라지도록 간절히 기도드리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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