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반영억 신부님_「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 |||
---|---|---|---|---|
이전글 | 이영근 신부님_2024년 6월 25일 화요일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 | |||
다음글 | 조욱현 신부님_기도와 용서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6-25 | 조회수12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반영억 라파엘 신부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길 기도합니다. 허물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앞서 내 삶의 여정에서 이웃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 형성도 어려운데 북한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인지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한마음이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결코, 두 사람이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치의 전제조건은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속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직 진심으로 품어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를 수박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하지만 담는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나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우쭐하지도 않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내지도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릿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잘난척하지만, 너도 별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 할 것이 없지 않으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