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 12 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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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6-26 | 조회수290 | 추천수6 | 반대(0) |
상황에 대처하는 인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문제(Problem)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제(Task)로 보는 겁니다. 문제는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있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순위가 정해집니다. 문제를 떠올리면 긍정적이기보다는 일단 머리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과제는 능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계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바뀌고, 흙길은 포장이 되고,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하나씩 생겼습니다. 과제는 희망이 되고, 과제는 성취가 되고, 과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을 문제로 보느냐, 과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상황은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시인 원천석은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비슷한 시조로, 길재는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국가도 찬란한 꽃이 피면 사라지는 것이 이치라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이방원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왕조는 사라지고, 화려했던 궁궐은 사라졌지만, 우리 조상들의 멋진 풍류와 문화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흥망성쇠를 겪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던 예언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슬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지내야 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비극과 고통을 ‘문제’로 생각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비극과 고통을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를 빼앗겨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 희망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활 신앙’입니다. 그 희망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을 준비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희망을 온몸으로 드러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문제로 생각하면 피곤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과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혼인법을 지켜야 하고, 금육과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는 미사참례를 해야 하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문제로 접근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리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과제로 생각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과제로 접근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릴지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과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는지, 과제로 인식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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