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7,21)
예수님은 강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하게, 당신의 사명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임을 삶을 통해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 총리 지명 후 14일 만에 결국 사퇴한 분이 어느 교회의 간증에서 언급하기를, 우리 민족의 일제 식민과 6.25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해서 믿지 않은 국민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 이 사안에 대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곡해가 잡음을 일으킨 것 같다.』 하고 발표했다고 하더군요. 진정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예수님의 심령과 같은 지향이 아니라 단지 입술로만 주문을 외듯이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숙고해 볼 일입니다.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기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하느님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도의 말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끝을 맺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때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삶은 아는 것만큼 살면 족하다, 고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문제는 대부분 알지 못해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아는 만큼 살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앎이 머리로 아는 지식일 뿐, 몸으로 경험하고 체득된 앎이 아니기에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지는 한 마디로 머리로 아는 지식과 삶에서 나오는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일부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신학적 논쟁 가운데 하나가 믿음과 행동의 상반된 견해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주님, 믿습니다.’고 열렬히 외쳐댑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에서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구원의 최우선 순위이지만 믿음과 동시에 주님을 섬기는 행위를 실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입으로만 주님, 주님’을 부른다고 해서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라, 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이 바로 이를 입증해 줍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꾀어야 보배’라는 속담대로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모래 위의 집짓기와 다를 바가 아니라고 오늘 복음은 적절한 비유로 강조하셨습니다. 누구의 집이 튼튼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큰비가 오면 금방 알게 되어 있습니다. 큰물이 들이닥치면 확고함과 확고하지 않음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사상누각은 큰비가 오면 그리고 큰물이 밀어닥치면 쉽게 쓸려 내려앉고 맙니다. 이렇듯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신앙인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명심하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다짐합시다. 몰라서 살지 못했다고 변명하지 말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멘.”